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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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復의 思想 硏究]

Ⅰ. 序

太平天國의 난 이후 曾國藩, 李鴻章 등 한인 관료의 주도로 이루어진 서구문물 도입 운동, 즉 洋務運動은 실패로 돌아갔다.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 사상으로 근본을 삼고, 서양의 문물제도를 활용한다는 中體西用을 모토로 삼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근본적인 개혁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의 東學運動을 계기로 일어난 淸日戰爭에서 청이 패배함에 따라, 서구 열강의 청에 대한 침탈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결국 청의 지식인, 관료들은 중국의 전통 문화,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대해 심각한 자성과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 사상을 최초로 체계적,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 바로 嚴復이다. 영국의 해군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엄복은 헉슬리, 애덤스미드, 허버트 스펜서,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사상을 소개했다. 헉슬리의 '進化와 倫理學'을 엄복이 번역하여 1898년에 발표한 [天演論]은, 당시 중국의 모든 청년 학생들이 머리맡에 놓아두고 읽는 책이 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엄복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 등 많은 책 번역하여 폭넓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엄복은 서양 근대 사상에서 서양의 부강함의 비밀을 찾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엄복은 자신의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전통주의자가 된다. 그는 영국의 진보문화를 직접 겪은 세대이면서 동시에 청에 돌아와서는 무용지물이 된 과거를 통해 정계로 진출하고자 노력한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만드는데 일조한 籌安會六君子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의 사상의 변천을 통하여 중국의 근대화 수용에 있어서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嚴復의 略歷


그는 1854년 福建성 福州시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부친이 의사를 하기는 했지만 사대부 계층에 속하고 있었고, 엄복도 어려서 과거시험 공부에 매진을 했다. 1866년 결혼을 했지만 콜레라로 인하여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은 급격하게 곤궁해져서 과거에 매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洋務運動의 일환으로 船政學堂 後學堂이 설립되어 입학하게 되었다. 1871년 수료 후에는 영국인 선장 밑에서 실습하다가 1877년 청조 최초의 유럽 유학생에 뽑혀서 영국의 海軍學校에 3년간 유학한다. 유학생활 동안 엄복은 영국의 해군 군사력에 관한 공부보다 영국 사회의 존재양식이나 사상, 철학 등에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洋務運動의 한계를 자각하기에 이른다. 귀국해서 선정학당에 돌아와 교원이 되지만 1880년 텐진에 水師學堂이 설립되자 總敎習에 취임하여 20년간 부임한다. 부임해 있는 동안에도 엄복은 꾸준히 八股文을 익혀 33세부터 41세까지 시험을 봤으나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더구나 41세때 엄복은 水師學堂의 교장이었음에도 과거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여 국가를 위해 평소의 포부를 펼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士大夫들이 學堂출신을 꺼려했기에 그는 합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엄복에게 淸日戰爭은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1895년에 그는 ‘直報’를 발표한다. 엄복은 이 글에서 ‘民智’, ‘民力’, ‘民德’의 3요소가 있는데 이 중에서 특히 民智가 중요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서양의 근대 과학을 중국에 도입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각종 서양서적의 번역에 힘썼다. 이러한 嚴復에 대해서 梁啓超는 “中国西学第一人”로 평가했으며, 魯迅은 “새로운 책을 보는 풍조가 유행하면서 나도 중국에 『進化論』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 일요일에 시내 남쪽까지 달려가서 사왔는데, 백지에 석판 인쇄된 두꺼운 책으로 값은 500원이었다. 펼쳐보니 글자가 아주 곱게 써있었다...(중략)...단숨에 읽어 내려가니, '生存競爭'이니 '自然淘汰'니 하는 말들이 나왔다.”라고 했으며, 胡適은 “[進化論]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전국적으로 유행했으며, 마침내 중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 몇 년 동안 이 사상은 들판에 옮겨 붙은 불길처럼 많은 소년들의 심장과 피를 끓게 했다. '進化'·'生存競爭'·'淘汰'·'適者生存' 따위의 술어는 신문에 자주 쓰이는 단어가 됐고, 愛國志士의 상용어가 됐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말들을 자신의 이름이나 자녀들의 이름에 즐겨 사용했다. 나 자신의 이름도 이런 풍조의 기념품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그가 번역한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898년에 번역한 [天演論]이다. 이는 근대적인 사상서를 정리된 형태로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인맥적으로 가까웠던 袁世凱가 몰락하자 은퇴하여 1921년에 사망한다.



Ⅲ. 嚴復의 社會進化論


엄복은 중국에서 지니고 있던 기존의 一治一亂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반대한다. 엄복의 사상의 기저는 스펜서의 社會進化論이다. 물론 엄복은 헉슬리의 [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한 [天演論]으로 유명해졌지만 헉슬리의 이 책은 스펜서가 진화론과 윤리학을 유기적인 관계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자 저술한 것이다. 그래서 嚴復이 [天演論]이라 이름 지은 것은 진화론과 윤리론을 분리해서 보는 헉슬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天演의 의미이다. 天演 evolution의 譯語인데 본래 헉슬리의 제목인 [Evolution and Ethics]였던 것이기 때문에 앞에서 그렇게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 평가가 나뉘어지고 있다. 高柳信夫는 문장을 엄복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서 문장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였고, 코멘트를 달았고, 엄복의 의견 및 헉슬리에 대한 비판이 함께 담겨 있기에 이를 보았을 때 엄복이 중국에 전하고자 했던 것은 헉슬리가 아니라 스펜서의 사상이었다라고 평가하는 반면에 王國維는 세상 사람들의 耳目을 집중시켰을 뿐 번역이 온전치 않으며 그의 학풍은 철학적이 아니라 과학적이다. 더구나 그의 의견에 附和한 자는 참 지식이 아니라 情意에서 나온 것이다. 학술적으로 봤을 때 천박하며 순수한 학문적으로의 가치가 없다고 혹평했다.


嚴復의 進化論은 스펜서의 社會進化論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는 생물학적 진화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여 자연세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사회 이론을 설명하고자 한 이론이다. 하지만 엄복은 진화론 자체보다는 서양의 군함과 무기, 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 서양의 가치가 지니는 의미를 학문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스펜서가 파악한 社會進化論의 핵심은 생존을 위한 다툼은 필연적이라 경쟁에서 승리한 개체만이 자손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를 엄복은 東西洋의 차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중서 사물의 이치가 너무 다르고 단절되어 합쳐질 수 없으니 중국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지금을 소홀히 하고, 서양인은 지금에 힘쓰고 옛것을 이기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중국인은 一治一亂, 一盛一衰를 하늘의 운행과 사람 일의 자연스러움으로 여기고, 서양인은 날마다 끝없이 나아가고 이미 이루어졌으면 다시 쇠하지 않고, 이미 다스려진 것은 다시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이를 學術政化의 최고의 법칙으로 삼았다.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嚴復은 自由라고 보았다.


그 명맥을 무엇이라 하는가? 요점을 말하자면 학술에서는 거짓을 쫓아내고 진실을 숭상하는 것, 刑政에서는 나를 굽히고 공을 위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이 두 가지가 중국의 도리와 처음부터 다른 것은 없었다. 생각건대 그들은 행하여 늘 通했고, 우리는 행하여 늘 좋지 않았으니 이는 즉 自由와 不自由의 다름일뿐이다.



Ⅳ. 嚴復의 自由에 대한 認識


嚴復은 중국과 서양의 근본적인 차이를 自由로 보았다. 이 自由가 서양을 발전시키고 自由가 없던 중국은 위기를 가져온 것으로 여겼는데 이 自由의 개념을 嚴復은 儒敎의 恕와 絜矩之道에서 찾았다.


중국의 도리가 서양의 법의 자유에 가장 비슷한 것을 말하길 恕라 하고, 絜矩라 말한다. 그러나 서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지만 진실로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인가? 중국의 恕와 絜矩는 오로지 사람 및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말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의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는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論語]에서는 恕를 ‘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했으며 [禮記]에서는 絜矩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천하를 평정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하면 백성에게 효가 일어나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면 백성에게 공경이 일어나고, 윗사람이 외로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는 絜矩의 道가 있는 것이다.


중국에도 自由가 없지는 않으나 嚴復은 이에 대해서 서양에서의 개념으로 쓰이는 自由의 의미로 중국에서 쓰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무릇 自由라는 한 마디는 진실로 중국의 역대 옛 성현들이 심히 두려워한 바라서 일찍이 세워서 교육을 한 적이 없다. 저 서양인들은 오직 하늘이 백성을 낳고, 각기 주어서 갖춘 것이니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이에 전부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嚴復이 自由를 주창한 것은 오로지 중국의 富强을 위해서였다. 서양의 강함은 自由를 體로 하고 民主를 用으로 했기에 그리되었다고 논하며 洋務運動의 폐해를 역설하면서 中國을 體로 하고 서양의 本質을 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복의 이러한 自由에 대한 주장은 당시 지배 계층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해서 張之洞은 嚴復의 自由에 대한 해석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외국에는 현재 自由黨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양어로 리버티(里勃而特)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일을 公道에 맞게 처리해서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마땅히 ‘公論黨’이라고 번역해야 하며, 自由로 번역하면 잘못이다.


이는 분명 초기에 自由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에서 일어난 영어 liberty의 해석에 대한 논의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嚴復의 自由의 개념은 고대 중국에서 사용하던 放縱의 의미가 아님을 내포한 것인데 張之洞은 自由는 그저 放縱에 지나지 않는 단어이므로 自由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張之洞의 해석에 다시 반박을 한 이가 何啓이다.


서양의 리버티(里勃而特)에 대해서 단지 ‘公道에 맞게 처리해서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公論黨이라고 번역해야 옳고 自由라고 번역하면 잘못이다’라고 말한다면, 중국의 위학과 속된 학문의 상투어를 갖고 서양 언어의 의미를 잘못 본 것이다. 리버티는 [中庸]에서 말하는 ‘하늘이 명령한 것을 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道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성은 하늘의 명령이므로 그것이 善이 됨을 알 수 있다. 도는 그러한 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그것이 自由임을 알 수 있다.


물론 何啓의 이 반박이 嚴復의 自由論과 같지는 않다. 도리어 근본적으로는 嚴復의 自由論은 나라의 富國强兵을 원하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張之洞과 비슷하다. 단지, 自由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張之洞이 반박을 한 것이다. 嚴復은 自由라는 단어의 어원보다는 중국의 富國强兵을 위해 서양의 liberty가 필요하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그것이 嚴復에게 있어서 自由였던 것이다.

Ⅴ. 結


嚴復은 1905년 영국을 방문하고 나서 論調가 기존의 입장에서 180도 선회한다.


그런즉 우리는 태어나서 중국인민이 되었다. 經을 버리거나 옛것을 업신여겨서는 안되며 진실로 깊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대개 敎化道德은 홀로가 아니며 중국이 중국이 된 것은 經을 本源으로 삼는데 있다.


1905년 이전에는 西學을 익혀서 망국을 구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嚴復은 영국을 다녀오고 나서는 입장이 中國을 固守하자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嚴復만의 문제는 아니다. 梁啓超도 [歐遊心影錄]에서 서양의 1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유럽을 보고 유학을 중국의 길이라고 보았다.

嚴復은 이러한 심경의 변화 이후 袁世凱를 지지하며 保守主義를 자처하고 나서서, 나중에는 袁世凱의 황제 즉위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1905년 이전의 서양 사상에 심취해있던 자신의 이론적 관점이 1905년 이후 經과 孔子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황제체제로의 복귀를 지지한 것은 西學에 대한 不信과 悔恨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嚴復, [嚴復集], 中和書局, 1986.

馬勇編, [嚴複語萃],<讀經當積極提倡>, 華夏出版社, 1993

양일모, [‘자유’를 둘러싼 유교적 담론 - 엄복 , 장지동 , 하계의 논쟁을 중심으로 -],철학연구 Vol.52, 2001

______, [옌푸(嚴復)의 근대성 인식], 동양철학연구 제52집, 동양철학연구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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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柳信夫, [近代 中國에서의 進化論의 導入 - 嚴復(1854-1921)을 一例로 하여-], 역사교육논집 Vol.4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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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진화론의 중국적 수용과 역사인식의 전환],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94

______,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삼인, 2003

______, [중국사상사], 동녘, 1992

______, [노신의 사회진화론 비판과 ‘民’의 발견], 역사비평사, 1994년 가을

劉明鍾, [近代中國에 있어서 西洋의 衝擊 ], 동아대학교 대학원논문집 Vol 13, 1988

김준형, [嚴復의 自由主義 수용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논문, 2004




Writtnen by 나그네

by 나그네 | 2009/09/30 22:37 | ◈중국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오늘의 단상

1] 세메냐 양성자

베를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여자부 경기에서 괄목할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세메냐. 경기 후 '남자 아니냐'는 성별 논란에 휩싸여 유전자 및 각종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데일리 테라그라프지에 보고 되었다. 세메냐는 양성자라는 것. 즉,

그는 자궁과 난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른(맞나? 하여간)이 있으며, 고환마저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즉, 그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가진 양성자라는 것인데 남성의 성기는 가지고 있지 않고 자궁은 없지만 여성의 성기를 지니고 있는 양성자라는 것이니, 고대 우리나라의 사방지 같은 존재도 아니고, 예전 1위를 했다가 성염색체 이상으로 우승을 박탈당한 인도의 순다라 얀과도 별개의 성격인 셈이다.

어찌보면 불쌍하지 않은가. 염색체 이상의 순다라 얀이야 자신이 '여성'으로만 알고 있다가 아니라는 판정에 쇼크를 받아 자살까지 헀다가 미수되었지만 세메냐의 경우는 본인의 이상성을 몰랐을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2] 신종 플루의 타고난 환경 적응력

이 병은 참으로 적응력이 무지하게 빨라 보인다. 처음에는 호흡기로만 전염 되었다가 피부 접촉으로도 전염되더니만 이후에 뇌로까지 전이가 되는 것으로 모자라 간에 까지 전이되는 신속한 파급력을 선보이고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신종플루 백신인 타미플루를 복용한 소녀 두명이 신종 플루에까지 걸렸다는 결과가 나와 모두를 당혹케 했다. 물론 그 두 소녀는 증상이 경미해 치료받고 나아 퇴원했으며, 우리나라 신종플루 거점병원에는 신종플루 검사 받으러 간 일반 정상인이 신종플루에 감염되기 까지 하여 격리 치료받고 있으니 이게 뭔 일이야?

타미플루 나온지 얼마되었다고 벌써 그 약에 내성을 지닌 신종플루가 나오다니... 이건 뭐라고 해야 하는거냐? 각종 매체에서 '감기'에 불과하다. 건강한 사람은 안걸린다라고 말을 하는데... '감기'를 건강한 사람은 안 걸리는 병도 아니고, 환절기에 면역력이 떨어져서 누구나 걸리는 병이 감기 아닌가? 즉, 그말은 신종플루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고, 지금과 같은 환절기야 말로 '적격'이지 않은가. 조심해야 한다. 손 씻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3] 야동 불법 업로더 고소

대개의 이야기들은 그러하다. 우리나라는 '야동 자체가 불법이다'라고 하여 '우리가 만든 야동도 아니고 해외의 야동을 들여와 그것을 유통하는게 죄 삼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건 어느 유딩 논리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마리화나'나 '대마'는 불법이다. 그럼 그것이 불법이므로 그것을 몰래 가지고 들어와 피우면 죄가 이니되나?

뭐 해외 업체들이 '헤비업로더'를 고소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해운대'불법 유통으로 우리나라 경찰권의 발동이 강력해지고 언론이 드세지자 여기에 발을 얹어 '추가 고소'를 하였다. 명분은 '자기네 작품만 저작권 보호하고, 우리의 작품은 저작권 보호 하지 않는가'라는 것에 대함인데...

처음에는 '헤비업로더'라고 하여 불법으로 자기네 작품을 다량으로 받아 업로드하여 네티즌들에게 '돈'을 받고 다운 받게 한 이를 고소한 것인데, 이번에 추가고소건은 '유료 유통 업로더'에게까지 파급을 벌인 것이다.

더구나 이 건은 '청소년 음란물'에 관련된 법으로 민사에 걸리기에 '친고죄'가 아니라서 왠만한 업로더들은 다 걸려들어가서 전과자가 대량으로 파생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도 있다. 자, 이 사건은 어찌 될 것인가.

그런데, 업로더만 문제고 다운로더는 문제가 없는건가?

야동을 보는 것이 남자에게 문제가 될까? 아니될까? 글쎼다...




Written by 나그네

by 나그네 | 2009/09/11 11:18 | ◈일상에서의생각 | 트랙백 | 덧글(0)

[선덕여왕] 신라 - 유목민족의 후예임을 드러내다???

오늘 선덕여왕을 보니 김유신과 알천랑이 비재 2번째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신라는 북방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이방인인 혁거세 거서간을 받아들여 옹립하여 왕을 만들었다.


이는 전형적인 '신라 = 북방 유목민족설'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대사이다.

물론 '그런 이야기도 있고'라고 하여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갔지만

얼마전에 문무왕릉비에 나왔고 '역사 스페셜'에서도 방송을 했으니

그것을 '신라의 선조 - 흉노족 김알지'로 몰고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 그럼 金氏는 김알지가 최초인가? 삼국사기에서 등장하는 성씨일뿐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지어진 사서이다. 거기에 김알지의 성씨가 등장한다. 김씨의 시조인 셈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이전의 사서가 우리나라에서는 없으니 중국측 사료를 뒤져봐야 하는데

바로 北濟書 신라편에 金眞興이란 구절이 최초로 등장한다.

우니나라 왕의 성씨가 최초로 사서에 기록된 것이다. 자 북제서는 언제 쓰여졌는가?

북제서는 636년에 지어졌다. 자그마치 500여년 전의 사서에 등장한 것이다. 삼국사기 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그 전에 신라가 성씨를 사용했는지 안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최초로 등장한 성씨임에는 확실하다.

그런데 김알지가 선조라니, 그리고 김알지가 흉노족의 후예라느니 하는 것은 무슨 말인가?

북방 유목민족 후예설은 김알지와 김수로 모두에게 통용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 실록'을 지은 박영규는 '수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김알지는 백제의 후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한의 후예로서 마한 부흥운동을 꾀한 마한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를 한다.

뭐 박영규야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 실록'에서 어처구니 없는 지도를 들이민 '대책없는 자자'이므로 그의 기록은 그저 잡설에 불과할 수 있다. - 수서를 찾아봐야 하는데 지금 바빠서 -

반면에 '한국 7대 불가사의'를 지은 이종호는 대놓고 '신라 김알지와 이후 미추이사금에서부터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저 문무왕 비석에 적힌 '투후의 후예'라는 단어로 신라의 김씨 세습 왕조를 흉노족의 후예에서

확대하여 '통일신라'이후의 한반도를 '흉노족의 후예'로 보는 것은 비약이 심해도 한 참 심하다.

뭐 철기를 잘 다루었다고 하여 스키타이, 알타이 뭐 말들이 많은데

한마디로 설레발 치는 것이다.

내가 '한국사'는 잘 모르지만 - 중국 고대사 전공이라 -

문맥만 가지고 모든 것을 '실체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Written by 나그네

by 나그네 | 2009/09/09 00:10 | ◈일상에서의생각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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