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20일
部曲의 변화
部曲의 변화
Ⅰ. 序論
우리는 部曲이라고 하면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천민이 사는 향, 소, 部曲을 두었다’라는 글에서 部曲이 인식되어져 있다. 물론 여기서 살펴볼 것은 한반도의 部曲이 아니며, 中國에 등장한 部曲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部曲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人身賣買에 의한 양민 몰락으로 인한 것이 部曲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후한말의 軍事兵力이 사적 예속민이 되어 남북조 시기 말엽에 노비와 양민의 중간단계인 部曲이 되었다는 견해다.
이 글에서는 중국에 部曲이 언제 등장을 했으며, 시대를 지나가면서 그 의미가 변화 되어갔음을 고찰하여, 당시 사회의 변화와 어떠한 상호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사용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部와 曲의 등장과 분류
A. 部校尉
部曲이 나오는 것은 史記, 漢書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後漢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군을 다스리는 데에 모두 部曲이 있다. 대장군은 5부를 거느리는데, 부교위 1인, 비 2천석 ; 군사마 1인, 비 1천석이다. 부 아래에는 곡이 있는데, 곡은 군후 1인이 있고, 비 6백석이다. 곡 아래에 둔이 있는데, 둔은 장 1인, 비 2백석이다. 부교위를 두지 않아도, 다만 군사마 1인은 둔다. 또 군가사마, 가후가 있는데, 모두 보좌하는 것이다. 별도로 군영에 부속되어 별부사마로 삼는데, 그 병사의 수는 각기 시기의 알맞게 따른다.
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部曲이 하나의 명칭이 아니라, 部와 曲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部의 校尉의 比 二千石은 百斛을 받았는데, 이는 中郞將과 같은 직급이고. 曲이 君侯 比 六百石은 六十斛을 받았는데, 博士, 議郞, 中郞등이 같았다. 물론 이 군제는 후한의 편제이긴 하지만, 전한 역시 部曲이 나오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편제가 크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部曲은 하나의 단어가 아닌, 校尉가 거느리는 部와 君侯가 거느리는 曲을 말하는 군대 편제 단위인 것이다. 部校尉를 四庫全書에서 찾다보니 희귀한 사료가 하나 나온다.
조공이 그 말을 좇아서 곧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삼고, 회계태수를 겸하게 하고 장굉을 회계동부교위로 삼았다.
오직 이 하나의 사료에만 東部校尉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삼국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 살펴보자.
조공이 그 말을 좇아서, 곧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삼고, 회계태수를 겸하게 했다. 조공이 영을 내려 장굉이 손권을 도와서 내부하게 하고자 하여, 장굉을 내보내 회계동부도위로 삼았다.
『삼국지』에서는 東部校尉가 아니라 東部都尉라고 되어있다. 部校尉와 部都尉는 다른 성격의 관직이다. 여기서는 部校尉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자. 상기 기록처럼 東部校尉가 있다고 한다면 西,南,北의 部校尉도 있어야 하지만 그런 기록은 있지 않으니 冊府元龜의 誤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部校尉는 오직 軍의 部에 하나만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史記에서도 諸部校尉라는 말은 수차례 등장하지만 다른 말은 일체 나오지 않는 것이다.
B. 軍司馬의 分類
이에 반해서, 軍司馬라는 단어는 많이 나타난다. OO將軍司馬라는 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살펴봤듯이, 部校尉와는 달리 軍司馬 이외에도 別部司馬가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別部司馬 이외의 다른 명칭의 部司馬를 살펴보도록 하자.
前後左右의 部司馬는 사군을 헤아리고, 병사를 통솔하는데, 位가 모두 2천석이다.
성도가 이미 평정되어 선주가 익주목을 겸하여, 비시를 독군종사로 삼고, 나가면 장가태수로 삼고, 돌아오면 주의 前部司馬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고, 한중왕에게 尊號를 칭하라고 권하였다. 前部司馬 비시가 상소하여 말하길...
이때 주의 後部司馬 촉군 장유 또한 점술에 밝아서, 타고난 재능은 周羣을 넘어섰다.
제왕 사마경은 국의 中尉가 되었는데. 내보내서 좌부사마로 삼고, 우부위로 천거하였다.
이는 州의 前後左右의 위치에 따른 部司馬의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右部司馬에 대한 사료는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前後左右의 部司馬를 설치했다는 『華陽國志』의 기록에서와 같이 설치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後漢書에서 軍司馬는 比이천석인데, 三國時代에 들어와서 나타난 前後左右 部司馬가 2천석이라는 것이 보인다. 이는 시기의 변화에 따른 그리고 戰時에 발생한 녹봉이 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C. 曲의 分類
部內에서 직종의 분화를 보이고 있는데, 그 하부조직인 曲도 변화하고 있음을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때 무기교위 사진량, 종대, 사마승 한현, 右曲候 임상등은 서역이 번번히 배반하는 것을 보고...
右曲候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前後左右가 있얻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部와 曲이라는 별개의 부대 명칭은 점차 서로 연 칭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연 칭된 部曲에 대한 기록은 漢書에는 5건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後漢書에는 25건이나 나타나고 있다. 後漢이 들어서면서 전란이 그치지 않아, 그로인해서 군사 활동이 활발해졌기에 部曲이라는 사병집단이 활성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Ⅲ. 시대별 部曲의 성격과 변천
지금까지 部曲의 유래와 시대에 따른 관직이 분화된 모습을 살펴보았다. 部曲은 軍의 하부조직으로서 부대 편제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리고, 전란이 되면서 점차로 部曲의 편제가 분화됨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시대별로 部曲이 어떤 활동을 해왔고, 전란시대에 어떤 역할을 끼치고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A. 後漢時期
광무제가 즉위하며 개창된 後漢은 초기부터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하여, 제하를 평정하느라 외부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部曲도 활발히 활동을 하는데 光武帝 29년에 部曲의 兵力을 충원하는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경엄을 보내어 오한과 더불어 부평, 획색적을 부평에서 공격하여, 크게 깨트렸다. 항복한 이가 4만여명이다. 이로 인해 경엄에게 조를 내려 장보를 진격하여 토벌하였다. 경엄은 항복한 병사를 모두 모아서 거두고, 部曲으로 맺고, 장리를 두고, 기도위 유흠, 태산태수 진준을 거느리고 병사를 이끌고 동으로 가서, 조양교를 따라서 제하를 건넜다.
이를 보면 항복한 병사를 거두어 部曲으로 편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수가 4만여명이다. 경엄은 이들의 일부를 취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받아들여서 部曲으로 편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後漢의 정규군의 편제이냐하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삼국시대에 이르면 청주의 황건적을 조조가 거두어 靑州兵으로 편제한 일이 있지만 이는 후한 정규군이 아닌 조조의 사병집단으로서 기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경엄의 4만의 部曲 편제 역시 사병집단으로서 기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部曲이라는 말이 정규 한나라 군 편제의 용어로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이 해, 흉노의 욱건일축왕 비가 部曲을 이끌고 사자를 보내어 서하에 이르러 내부하였다.
차뉴등은 여러 우두머리를 이끌고 골도후에게 항복을 빌었는데, 오사는 오히려 그 部曲을 이끌고 오환과 더불어 도적질하고 약탈하였다.
위와 같이 흉노 무리의 병사도 部曲이라 하고, 도적떼들도 部曲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전한시대에 한나라 정규 군제였던 部曲이 후한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력 집단, 부대의 무리, 병사 집단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部曲이 사병집단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가의 상 이보가 거만하고 무례하여, 등우가 그를 베었다. 이보의 동생이 이보의 部曲을 거두어 등우를 공격하여, 장군 경흔을 죽였다.
형이 죽자 형의 部曲을 동생이 받아서 거느린 것이다. 이는 혈연에 따라서 통솔권이 계승되는 것을 보여주므로 私兵集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후한 초기의 部曲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後漢末에 이르러서 다시 변하게 된다.
B. 三國時代
後漢末에서 三國時代에 들어서면 새로운 명칭이 하나 나온다. 바로 部曲將이다.
6년, 사예교위 원소가 중관을 베어 멸하고, 대장군 部曲將 오광이 거기장군 하묘를 죽이니,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동탁의 部曲將 이각, 곽사 등이 먼저 병사를 이끌고 관동에 있었다.
안서장군 양정은 옛날 동탁의 部曲將이었다.
처음에 살펴봤듯이 部에는 部校尉와 軍司馬를 두고, 曲에는 君候를 둔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에 들어와서는 部曲將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部曲을 하나의 단위로서 사용을 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部曲將이라는 말이 없이 그저 部曲으로서 집단이 아닌 개인적인 首領을 설명하기도 한다.
처음에 여포가 왕윤에게 동탁의 部曲을 모두 죽이라고 권하자, 왕윤이 말하였다. “이들은 죄가 없으니 불가하다.”
이 기록에서 여포가 동탁의 部曲을 모두 죽이라고 권하는데, 이는 동탁의 部隊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部曲의 首將들을 죽이라고 권한 것일터이니, 이쯤되면 部曲의 용례가 집단, 무리에서 部曲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首將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漢朝가 아니라 개인적 관계의 형성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 동탁의 주살 후 그의 部曲이었던 이각, 곽사, 장제, 번조가 漢을 상대로 동탁의 원한을 갚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후한 초기의 개인 사병 집단으로서의 연대감을 지니고 있음이 변화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더 나아가 더욱 긴밀한 연대의식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故部曲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장안은 이미 10여만과 함께 동탁의 故部曲 번조, 이몽등이 합하여 장안성을 포위하였다.
이는 그저 동탁의 옛 部曲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故部曲은 전에 모시던 상관을 평생 따를 정도로 상하의 밀접하고 친밀함이 죽어서도 지속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主가 죽자 동생이 거두어 복수를 하는 것이고, 董卓이 죽자 그의 部曲들이 漢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단순한 상하주종관계가 아닌 것이다.
개인 사병집단화가 된 部曲은 삼국지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소의 자는 백도이고 태원 사람이다. 사람됨이 웅장하여, 어려서 군에 들어가 部曲督이 되어, 수차례 전공이 있어, 잡호장군이 되었다.
하진, 하묘의 部曲은 소속된 바가 없어, 모두 동탁에 이르렀다.
후에 마등은 한수와 불화하여 경기로 돌아가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불러서 도위로 삼고, 마초를 편장군으로 삼고, 도정후로 봉하여 마등의 部曲을 거느리게 했다.
위연, 자는 문장, 의양 사람이다. 部曲을 거느리고 선주를 따라서 촉에 들어, 수차례 전공이 있어, 아문장군으로 천거되었다.
원술이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손견의 部曲을 손책에게 돌려보냈다.
3년 여름, 곽마가 반란했다. 곽마는 본래 합포태수 수윤의 部曲督이었다.
여기서 部曲督이라는 관직이 나오는데 部曲將과 같은 部曲의 首領으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진, 하묘의 사건에서 보이듯이 상관이 죽어서 소속될 곳이 없는 이들은 그 직을 계승한 이에게로 이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초의 경우처럼 부친이 소재지에 있지 않으면 아들에게 이어지는 것을 보아, 후한 초기와 같은 계승은 변하지 않았다. 손책의 조에서는 부친의 部曲이 자식에게 이어지지 않으면 그 상관의 상관에게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특히 이전의 조를 살펴보면 部曲의 존재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전의 자는 만성, 산양 거야 사람이다. 이전의 종부는 이건으로, 웅대한 기개가 있어, 빈객을 합한 수 천여가가 승씨에 있었다. 초평 중에, 무리로 태조를 따라서, 수장에서 황건을 깨트리고, 또 따라서 원술을 공격하고, 서주를 정벌하였다. 여포의 난때, 태조는 이건을 보내어 승씨로 돌아가게 하여, 여러 현을 위로하였다. 여포의 별가 설란, 치중 이봉이 이건을 불러 같이 배반하고자 하였으나, 이건이 듣지 않아, 마침내 이건을 죽였다. 태조가 이건의 아들 정으로 하여금 건의 병사를 이끌고, 여러 장수와 함께 설란, 이봉을 공격했다. 설란과 이봉이 깨트리고, 좇아서 연주를 평정하여 여러 현의 공이 있어, 점차 청주자사로 천거되었다. 이정이 죽고, 이전이 영음령에서 옮겨 중랑장으로 삼고, 이정의 군을 거느리게 하고, 이호태수로 천거하였다. 태조가 원소와 더불어 서로 관도에서 겨루고 있을때, 이전이 종족과 部曲을 거느리고 군량과 비단을 수송하여 군을 도왔다...이전의 종족, 部曲 3천여가가 승씨에 있었는데, 스스로 위군에 이르러 옮기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경은 경순을 따르고자 함인가?” 이전이 말하길 “이전은 노둔하고 겁 많으며 공은 보잘것없는데, 작과 총애가 너무 두터우니, 실로 마땅히 온 종족들과 그 힘을 펼쳐야 합니다. 더하여 정벌이 그치지 않는데, 마땅히 교외 땅의 안을 채워 사방을 제어하려는 것이지, 경순을 따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 했다. 마침내 部曲과 종족 1만 3천여 명을 옮겨 업에 거주케 했다.
이를 보면 반드시 자식에게로만 계승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건의 아들 이정에게 후손이 없어서 이전이 이어 받았을 수도 있다. 이정에게 후손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료에서와 같이 반드시 자식에게 계승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통전을 살펴보면 반드시 일족이 아님에도 군대를 병합하고, 병합된 무리들이 왜 상관과 친밀한 연대감을 가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통은 자가 문달이고 강하군 평춘현 사람이다. 의로운 행동과 협기로써 장강과 여수 사이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같은 군 사람 진공과 함께 낭릉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했다. 그 당시 주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부하가 2천여 가구나 되었다. 진공과 이통은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었으나, 속으로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통은 주직을 죽일 것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진공이 어려워하였다. 이통은 진공에게는 과단성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독자적으로 계책을 정하여 주직과 회합을 열어 술이 취하자 주직을 살해했다. 사람들은 큰 소동을 벌였지만, 이통은 진공을 이끌고 그 도당의 우두머리를 주살하고, 그 진영을 모두 병합했다. 후에 진공의 처남 진합이 진공을 죽이고, 그의 부하들을 다스렸다. 이통은 진합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진합의 머리를 베어 진공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또 황건군의 우두머리 오패를 사로잡았고 그의 부하들을 투항시켰다. 마침 대기근을 만나자, 이통은 집이 기울 정도로 베풀고 가산을 모두 흩어 구제하고, 사졸들과 함께 거친 음식을 먹었으므로, 모두 다투어 그를 위해 공을 세우려 했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은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주직이라는 자의 부하 2천여 가구라는 것은 사졸집단으로서 部曲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통이 죽이고 그의 부하를 병합했다고 되어있다. 部曲은 상관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로 故部曲이라고까지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러지 않고 있다. 더구나 이통은 동료였던 진공의 부하까지 거느리면서, 황건군의 부대까지 병합하였다. 그럼에도 이통은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 이통전 마지막에 그 이유가 있다. 이통은 자신의 가산을 모두 풀어서 사졸과 함께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部曲이라는 것이 그저 아랫사람이 윗사람만 따라서 평생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상관의 저러한 마음 씀씀이가 있기에 部曲이 아들에게, 일족에게 이어지면서까지 평생 사졸집단으로서 운영된 것이다. 특히, 『鼯鼠』의 한 당전에는 部曲에 대한 두 가지 사례가 나와 있다.
① 한당은 勤苦함 속에서도 공을 세웠으나, 군대의 陪隷로써 영웅호걸들에게 분속되었기에, 작위를 더해주지 못하고, 손견이 세상을 죽을 때, 별부사마로 삼은 것이다.
② 그해, 손권이 석양을 정벌하였는데, 한종에게 부친의 상이 있다 하여 무창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한종은 음란하고 불궤한 짓을 하였다. 순권이 비록 그 아비 때문에 책문하지는 않았으나, 한종은 속으로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부친의 운구를 싣고, 모친의 집안에 속한 部曲들 남녀 수천명을 데리고 위나라로 달아났다. 위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삼고, 광양후에 봉했다. 수차례 변경을 침범하고, 백성들을 살해하니, 손권이 항상 이를 갈았다. 동흥의 일때, 한종이 선봉장이 되었는데, 군대는 패하고 자신은 죽으니, 제갈각이 그 머리를 베어 보내어 손권의 묘당에 아뢰었다.
陪隷라는 것은 시중드는 몸종, 奴僕을 의미하는데 한당이 군대의 노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당이 陪隷였기 때문에 작위를 더하지 못하고 별부사마로 그쳤다는 기록이다. 이는 한당이 部曲에 속하여 늘 다른 장수의 수하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삼국시대의 오나라에서의 部曲이 드디어 노예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당의 아들 한종은 모친 일족의 部曲을 이끌고 위나라로 넘어가 오의 변경을 수차례 괴롭혔다는 사실에서 部曲이 전란 상황에서의 國에 끼치는 영향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私兵集團인 部曲이 드러난 시기가 남북조시기이다.
C. 南北朝時代
남북조시기에 나타나는 단어가 바로 家部曲이다.
포홍이 장안에 이르러 석호에게 말하기를 관중의 호걸 및 저, 강인을 옮겨서 동쪽 지역을 채우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여러 저인들은 모두 洪家의 部曲으로, 홍이 인도하면 좇을 것이며, 누가 감히 어기겠습니까?” 석호가 그를 따라서, 진주와 옹주의 백성 및 저인, 강인 10여만호를 관동에서 옮겼다.
즉, 家의 部曲이라는 말로 私兵集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洪家部曲 만이 아니라 郭家部曲이라는 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가문의 사병집단이 일상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조 시기는 전란의 시대로 部曲의 활동력이 활발한 시기였다. 후한말부터 삼국시대로 이어져 내려온 대대로 가문의 병력인 部曲만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部曲이 등장을 하기에 이른다.
경사의 큰 난에 이르러, 조적이 친가의 무리 수백가를 이끌고 회수, 사수로 피했는데, 동행하는 노인과 질병 있는 이를 실어 거마에 태우게 하고는, 몸소 스스로 걸으며, 약과 물건, 의복과 식량은 무리와 더불어 같이 하며, 또 권모와 지략이 많아, 그래서 어린 아이와 어른 모두 그를 존숭하여, 조적을 추거하여 행주로 삼았다. 사구에 도달하여, 원제가 미리 써서 서주자사로 삼고, 정군자좨주에 이르고, 단도의 경구에 거하였다. 조적은 사직이 기울고 엎어졌기 때문에, 늘 다시 떨쳐 일으킬 뜻을 품었다. 빈객의 의로운 무리는 모두 난폭하고 흉포한 용사였는데, 조적은 그를 예우하는 것을 자제와 같이 하였다. 양토에 큰 흉년이 들었을때, 그 무리들이 많이 도적질을 하고, 부유한 집을 쳐서 훔쳤는데, 조적은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그들에게 물어 말하길 [이들이 거듭해서 남당에 나간 것은 아니잖은가?] 어떤 경우에는 관리에게 잡힌 적 있었는데, 조적이 거듭 옹호하여 그를 구해 풀어주었다.
조적의 행위는 部曲의 首領과 같다. 그리고 초기에 親黨을 거느렸다고 하니 部曲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그는 그네들의 존숭을 받아서 行主로 추거된다. 행주는 행하는 이들을 주관하는 이라는 뜻으로, 난을 피해 이동하는 무리의 행동을 주관하는 이로서 그들로부터 추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친밀감으로 이어져 자진해서 조적의 部曲과 아울러 병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적은 그네들의 범법까지 아울러 비호하였으므로 그들과 긴밀하고 친밀한 연대감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긴밀한 연대감은 나중에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나라를 배반하기에 이른다.
아들 유조가 나이가 어려, 성제는 서주를 치감에게 주고, 곽묵으로 북중랑장을 삼고, 유하의 部曲을 거느리게 했다. 유하의 매부 전방 및 옛 장수인 사질, 변함, 이룡 등이 그에게 속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같이 유조를 세우고, 유하의 옛 지위를 물려받아 배반하였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듯이 部曲은 이제 중앙 정부의 명에 의해 통제가 되지 않고, 部曲 首領의 일가 혈연의 구성원으로서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무력 집단으로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남조의 상황이다. 북조는 남조와 그 상황이 달랐다.
석고가 옮기자, 그 部曲이 고호정의 좌우로 삼아 머물기를 기원하자, 고호정이 조정의 제도를 비유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여,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部曲의 首領이 자리를 옮겨가자 部曲이 따라가지 않고 새로이 자발적으로 首領이 된 이의 部曲이 되고자 하였다는 기록은 남조와는 상황이 다르다. 더군다나, 고호정은 部曲을 거두지 않고 옛 首領에게 돌려보내면서 조정의 법도 운운한 것은 나라가 部曲을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部曲이 세습이 되지 않으며, 部曲이 다스리는 이를 선택할 수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고호정이 거절하여 이루지 못했지만 그 새로운 首領이 받아들이면 그의 部曲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部曲의 옛 首領에게로의 復歸를 꺼리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석고의 일례를 제외하고 다른 여타의 기록을 살펴볼 수 없었다.
이러한 사병집단으로서 部曲의 지위는 남북조 시기에 가장 활성화 되어 조정의 군사력이 아닌 개인, 가문의 힘을 키워주는 토대가 되어가면서, 동시에 예속화 되어가는 사례 또한 같이 등장을 한다.
Ⅳ. 部曲의 전락
部曲이 노예처럼 여겨지게 된 시기는 역설적으로 部曲이 가장 활성화 되던 남북조 시기이다. 部曲의 구성 세력은 앞서 살펴봤듯이 賓客, 家黨, 鄕黨, 降兵, 難民, 盜賊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전란의 시기에 部曲의 首領을 따라서 전쟁터를 누비고, 나아가 아들에게로, 친족에게로, 이어지면서 노복화 되는 경향 역시 두드러진다.
얼마후, 마침내 직을 떠나 산으로 돌아가, 동림사에서 거하였다. 밭 수십경, 部曲 수백명을 데리고 있어, 이끌어 밭을 갈아, 산의 무리에 모두 이바지하여, 멀고 가까운데서 사모하여 귀부하니, 그에게 다다른 이들이 시장과 같았다.
이는 部曲의 수장이 관직을 떠나 산에 들어가 밭을 갈며 사는데 자신의 部曲을 이용한 것이다. 즉, 私兵集團으로서의 部曲이 점차로 部曲의 首領 개인의 생활력에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군대가 천재지변, 전란속에서 민간을 위해서 어떠한 구휼 작업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처럼 관직을 떠난 首領을 따라 들어가 밭가는 일을 했다는 것은 전문적인 私兵으로서만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며, 이는 점차로 개인의 隸屬化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가문의 집단 속에는 客이 있어 客女, 田客, 衣食客의 집단이 있어 그 구분을 나누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部曲은 兵客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하면, 반대로 이러한 客들이 賤民으로 지칭되는 客女로 귀결되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의문을 표하는 견해도 있다. 이들 견해에 따르면 이 시기에 部曲이 예속화 되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私兵集團인 部曲을 자신의 개인적 용도에 맞게 이들을 사용한 것이니 奴婢의 신분으로 전락되어 갔음을 드러낸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北周時代에서 볼 수 있다.
조를 내려 영희 3년 7월이래로부터, 작년 10월 이전까지, 동쪽 땅의 백성은, 약탈을 당하여 안에서 노비로 삼아 변화한 자 ; 강릉을 평정한 후에 이르러, 양인이 노비로 되어 몰락한자 ; 모두 마땅히 방면하였다. 살고 있는 곳의 적에 붙이니, 모두 평민이다. 만약 옛 주인이 오히려 모름지기 같이 거하고자 하면, 머무르게 하여 部曲과 객녀로 삼는 것을 들어주었다.
여기에 部曲과 客女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노비로서 조정에서 방면된 자들이다. 그러나 혹여라도 옛 주인이 같이 살고자 하면 들어주어 그네들을 部曲과 客女로 삼게 해주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옛 주인이란, 이전 奴婢 이었을 시의 주인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奴婢와 部曲은 그 級이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앞서 살펴봤듯이 上級賤民이라고 말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을 그렇게 노비와 다른 上級이라고 불러야 할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남북조 시기의 部曲은 私兵集團이다. 점차로 전락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무력세력이라는 것이다. 部曲으로 삼았다고 上級賤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들은 본래가 ‘평민’이었다. 그러나, 전란을 당하여 약탈을 당하고, 전쟁 이후에 몰락하여 노비가 된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사면해 준 것은 자신의 본래 지위로 복귀한 것이다. 이 기록은 조정이 ‘部曲’을 조칙으로서 私兵集團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결론
部曲은 이르길 私家의 소유이다. 그 처는 良人, 客女, 奴婢를 通하여 장가를 들었다.
이 기록은『唐律疏義』에 실려있다. 남북조시기를 지나 수나라에 이어 당대에 이르면 전란이 잦아들게 되면서 部曲은 더 이상 私兵集團으로서 활동을 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통일국가 당으로서는 私兵集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部曲의 아내는 양인으로부터 객녀, 노비였음을 보아 하천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部曲을 재물과 같이 취급하지 않았으므로, 재물로 치는 奴婢와 다르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部曲이 奴婢랑 결혼하여 部曲이 奴婢로 전락하였거나, 奴婢가 部曲으로 昇級한 기록 또한 없으니 이에 대한 구분은 매우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전란을 통일한 나라에서 더 이상 私兵集團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란을 통하여 상하예속관계가 진행된 部曲을 罷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는 私兵集團으로서의 部曲이 아닌 私賤民으로서의 部曲을 남겨두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Written by 나그네
# by | 2009/06/20 17:14 | ◈중국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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