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글루스 | 로그인  


三國志에 대한 理解

Ⅰ. 三國志란

 

『三國志』는 西晉의 陳壽가 쓴 正史로서 司馬遷의 史記, 班固의 漢書, 范曄의 後漢書와 함께 前四史로 인정받은 史書이다. 사서를 살펴보면 확인하여 알 수 있듯이 기술된 시대를 알 수 있지만 그와 함께 저자의 당시 저술하던 시대상황 또한 파악할 수 있는 다면체적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 살펴볼 것은 진수의 생애와 함께 사서를 쓰면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史觀, 그리고 이후 논의되어진 正閏論과 함께 삼국지의 서술방식을 살펴서 그 본질과 한계를 알게되면 『三國志』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Ⅱ. 陳壽의 生涯

 

『三國志』의 저자인 陳壽는 중국 西晉사람으로 魏․蜀․吳 三國이 대립하던 시대에 蜀에서 233년에 태어나 西晉에서 297년 세상을 떠났다. 陳壽가 태어난 蜀은 삼국시대에 앞서 漢代에 司馬相如, 嚴君平, 兩雄 등 문학, 사상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학문적 소양이 높던 곳이다. 陳壽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譙周에게 학업을 배워 『尙書』,『春秋』,『史記』,『漢書』 등을 읽었다. 陳壽는 蜀나라에서 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으나, 後主 劉禪이 총애하는 환관 黃皓에게 거슬렸기 때문에 몇 차례나 관직에서 파면될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陳壽의 나이 33세 때, 蜀나라가 망하고 이어서 司馬氏의 晉나라가 魏나라를 차지하자 陳壽는 晉武帝 司馬炎의 신임이 두터운 張華에게 인정받아서, 佐著作郞과 陽平令을 역임했다. 이후 著作郞과 巴西郡中正을 거쳐 治書侍御史를 지냈다. 그리고 晉나라의 太康 원년, 魏․蜀․吳 三國의 역사를 정리하여 『三國志』 65권을 완성했다. 이때 夏候潛은 이미 『魏書』를 저술하고 있었는데 陳壽의 『三國志』를 보고 나서 자신의 책을 찢어 버릴(『晉書』, 卷八十二, 陳壽列傳)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진수를 총애한 張華와 달리 그를 배척했던 荀彧 때문에 長廣太守가 되자 陳壽는 모친이 병약하다고 하여 관직을 사양했다. 그후 진남대장군 杜預가 수도를 떠나 부임할 때, 陳壽의 지식이 깊고 넓음을 알고 표를 올려 산기시랑으로 추천해 임명될 수 있었다. 황제는 진수가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감당했으므로 다시 治書御史로 임명하여 황제 곁에 두었지만 陳壽는 후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관직을 버렸다. 그의 모친은 임종하면서 시신을 수도 洛陽에 매장하라고 유언했다. 陳壽는 유언에 따라 처리하여 세인의 비난을 받았는데, 모친을 고향 蜀 땅에 매장하지 않는 것은 예교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년후 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 후 병사했다.

 

陳壽는 일생동안 다작을 했는데 武帝 태시 10년에 『諸葛亮故事集』 24권을 편성하고, 『益部耆舊傳』 10편을 편찬하였으며, 그리고 咸寧 4년 治書侍御史 재직시 『官司論』 7편을 편찬하여 晉武帝에게 官司의 개혁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외 『釋諱』와 『廣國論』을 편찬했다. 그리고 晉武帝 咸寧 6년 吳가 멸망하자 이후 10년만에 『三國志』 65권을 편찬하였다. 『敍錄』이 1권 있었지만 망실되었고, 『魏名臣奏事』 40권, 『 漢名臣奏事』 30권, 『益州耆舊雜傳記』 2권, 『晉駁事』 4권, 『晉彈事』 9권 및 『古國志』 50권 등을 편찬하여 후대의 사학 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三國志』를 제외하고 모두 亡失되었다.

 

 

Ⅲ. 時代的 狀況과 陳壽의 史觀

 

후한 말년에 황건의 난이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면서 각지 군웅들이 할거하며 서로 천하를 두고 다투다가 220년 조비가 한왕조로부터 선양받아 魏나라를 세우고, 221년 유비가 익주에서 蜀漢을 건립하고, 222년에 손권이 강남에서 吳를 건립하면서 삼국이 정립하게 된다. 하지만 위나라에서 대지주의 지지를 받던 사마씨가 조위정권을 탈취하고 촉, 오를 멸망시켜 晉왕조를 건립하였으나 50년만에 와해되어버리고, 사마씨의 晉나라 세력은 강남으로 천도하여 東晉을 세웠다. 반면에 북방은 16국의 혼전 할거상태속에서 5胡(선비, 흉노, 갈, 저 ,강)가 각 왕조를 세우고 멸망시키고 교체하면서 연이은 빈번한 전쟁으로 어수선하고 불안한 난세의 시대였다. 이러한 난세의 혼란상은 370여년간 계속 이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의 봉건경제제도인 토지사유제도는 대토지를 점유한 호족지주들이 각 세력을 규합하여 강대한 사병을 유지하면서 봉건 장원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봉건 장원제도는 국가가 분열하고 할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회적 지표가 되었다. 더구나 북방에 들이닥친 소수민족을 대융합으로 이끌었고 이로인한 중화과정 또한 가속되었다. 이러한 민족 융합은 사회경제 발전의 과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는 엄청난 과학적 발전을 이루는데 祖沖之, 葛洪, 裵秀, 酈道元, 賈思勰등의 걸출한 과학자들의 등장으로 인한 성과였다. 과학적 발전은 후한에 蔡倫이 발명한 제지법을 개선하여 문자 서사에 응용되기 시작하여 점차 종이가 문구의 대열에 끼이게 된다. 제지법의 개선은 삼국시대 위나라 시기에 점차 유행하여 서진대에 이르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晉書』,卷九十二, 文苑列傳, 左思篇)’라는 말이 생겼다. 동진 말에 이르면 종이는 비단, 목간을 대신해서 보편적인 서사자료가 됨으로써 대나무나 비단은 그 종적이 끊기게 된다.

 

고대에는 서적이 흩어져 없어지기 쉬워 전, 후한 왕조들은 통치를 공고히 할 필요성으로 인해 문헌도서를 수집하는 사업을 벌이는 것을 일상화 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이러한 전적 수집을 급선무로 삼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은 ‘위가 한을 대신하자 모아놓은 서적이 망실’되었다라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북주의 무제가 북제를 평정하자 먼저 서적보관부를 봉쇄했다’라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북위정권은 남조의 제정권에게서 서적을 빌리기도 했다. 즉 이시기는 수집이 목적이 아니라 장서목록을 정리 편집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도서분류 중에 ‘簿錄’이라고 하는 독립된 분야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상당한 부분이 완비되면서 위진남북조 사학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사학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의 형성은 위진남북조 시기의 각 정권이 사서를 편찬토록 한 기록은 끊임이 없었다. 각 정권 모두가 두루 사관을 설치했으며 동시에 사서편찬을 전담하면서 거기에 상응하는 명칭을 부여받게 되는데 위나라 명제 태화연간에 출현하게 된 ‘著作郞’이 그 대표적인 직급이다. 著作郞은 진나라에 大著作이라 일컬었으며 남조에서는 ‘修史學士’, ‘撰史學士’라고 불렀다. 이 직급들은 고상하고 명망있는 지위여서 『晉書』閻纘傳에서는 ‘직무는 한가하고 대우는 중요시되어 귀족, 세력가들이 이 직책을 다투었다’고 할 정도였다. 사관제도의 발전과 시대적 사료의 보존과 편찬의 중대성이 커지면서 위진남북조 시기의 사서가 번다해진 원인이 되었다.

 

더불어서 史學이란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도 이 시대였다. 『晉書』石勒載記의 任播 ․ 崔睿를 사학좨주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사학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으며, 宋 元嘉 15년에 유학 ․ 현학 ․ 사학 ․ 문학의 4관을 두고 있다. 이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사학이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隋書』經籍志에 보면 양 무제가 三皇부터 梁에 이르기 까지 『痛史』 480권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 ‘통사’ 라는 용어도 이 시대에 처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正史’ 란 용어도 梁 元帝때 經史를 읽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오경 이외에 정사란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이렇게 사학은 점차로 그 위치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어가면서 각 정권으로부터 대우를 받게 되자 경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어 그 위치가 경학 다음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東晉 시대에 도서를 정리하면서 五經을 甲部, 史書를 乙部, 諸子書를 丙部, 詩賦를 丁部로 순서자체가 경학 다음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이는 사학의 발전과 학술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다.

 

진수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진나라에서 著作郞으로 있던 인물이다. 삼국지를 살펴보면 유독이 일식, 지진, 신성의 출현, 황룡이나 청룡의 출현, 봉황, 꿩, 자연이상상태 등에 대한 기록이 빈번히 나타난다. 진수는 이러한 자연이상상태를 인간사와 관계시켜 결부시키려 했다. 즉, 이러한 자연의 이상 징후는 인간세계에 대한 하늘의 징조라고 인식을 하였다. 魏書 文帝紀를 살피면 조비가 위왕이 된 장면에서 ‘3월 황룡이 초 지방에 나타났다(初 漢熹平五年 黃龍見譙.『三國志』,卷二, 文帝紀, )’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고는 45년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밝혔으며 ‘4월에는 용안현에 흰꿩이 나타났다(앞의 책, 夏四月丁巳 饒安縣言白雉見)’고 하고 ‘8월에는 석읍현에 봉황이 모여들었다(앞의 책, 八月 石邑縣言鳳皇集)’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비가 그해 10월에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된 것에 대해서 일종의 천명을 부여하였다. 진수가 위나라에 천명을 준 것은 위를 이은 진나라에도 천명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이다. 魏書 三少帝紀의 기록에는

 

十二月壬戌 天祿永終 曆數在晉 詔群公卿士具儀設壇於南郊 使使者奉皇帝璽綬冊 禪位於晉嗣王12월 임술 하늘의 복록은 영원할것이며 하늘이 정해준 운세는 진에 있으니 여러 공경으로 하여금 남교에서 의식을 행하고 사신으로 하여금 황제의 인수를 받들어 계승자인 진조의 왕에게 양위하였다. 『三國志』,卷四, 三少帝紀,

 

라면서 찬하면서 동시에 선양을 한 조환에 대해서도 훌륭한 인물이라고 극찬한다.

 

陳留王恭己南面 宰輔統政 仰遵前式 揖讓而禪 遂饗封大國 作賓於晉 比之山陽 班寵有加焉.

진류왕은 공손히 제위에 있으면서 재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관장하게 했고 한위교체의 전례에 따라서 양위하여 대국을 봉읍으로 받았으니 진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은 셈이다. 산양공에 비하면 진나라로부터 보다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다.『三國志』,卷四, 三少帝紀,

 

대개의 사서는 전왕조와 현왕조를 평하면서 전왕조의 마지막 왕조를 폄훼하면서 그로인해 현 왕조 태생에 대한 대의명분을 세워준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그러한 식으로 하은주 삼대의 마지막 왕과 새왕조 개국조의 평가를 그렸다. 그런데 진수는 전혀 상반되게도 위나라 마지막 황제를 칭찬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명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조환을 추켜세우므로 하여 별탈없이 선양으로 왕위를 물려주므로 하여 자연스럽게 천명을 받은 진나라가 세워질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이는 진수의 스승인 초주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주는 부단히도 끊임없이 ‘항복’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천명론자였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올때에도 ‘항복’을 주장하여 유파로부터 죽을뻔하기도 했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강한 나라를 치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논리를 설파하기도 한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가 쳐들어오자 ‘결사항전’을 포기하고 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사기와는 상관없이 촉한의 수도인 성도를 들어 항복해버리므로 하여 천명론을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진수는 그런 초주의 제자로서 그러한 천명론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다고하여 초주와 진수의 잘못으로 삼을 수는 없다. 자연이상상태를 아직 발달하지 못한 과학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한계성을 ‘천명’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대다수의 모든 이들이 따랐던 그래서 진수도 예외적일 수 없었다.

 

진수는 晉으로부터 관변사학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는 진수가 의도적으로 西晉왕조의 사마씨의 입장에서 三國志를 저술하여 감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수의 성향에 대해서 조익은 卄二史箚記에서 ‘제왕을 무고하여 사마씨에 가담함이 심하다’, ‘열전에서도 사실이 나타나지 않으니 곡필이 심하구나’라며 지적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趙翼, 『卄二史箚記』, 三國志多廻護). 三國志가 폄훼하고 포폄하고 은닉시키는 것의 대표적인 예가 ‘死諸葛走生仲達’에서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이는 『漢晉春秋』와 『資治通鑑』에도 버젓이 실려있는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러한 진수의 사마씨 감싸기에 대해서 劉知幾는 ‘사마의가 위수가에 근거지로 했다가 제갈량에게 굴욕을 당했던 것이나 사마소가 운대에서 모반해서 成濟를 죽인 사실 등에 대해서 진수나 왕은 등은 함구하여 말이 없었다(劉知幾,『史通』, 卷七, 直書)’라면서 그의 사실은폐를 힐난했다. 진수는 당시 자신의 위치와 위진남북조 시기로 들어가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삼국지를 편찬하였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은폐, 은닉, 폄훼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진수만의 잘못은 아니다. 공자의 춘추필법식 역사기술 방식은 사마천과 반고를 지난 이 시대에도 유지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Ⅳ. 正閏論 論爭

 

중국의 사서 기술 방식은 크게 編年體, 紀傳體, 紀事本末體로 나뉜다. 編年體는 연도를 따라 사건을 기록하는 이른바 연대기 형식이다. 그 때문에 『隋書』 經籍志편에는 편년체의 역사책을 史部⋅古史類로 분류하고 있어 古史體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편년체 역사서로는 『春秋』·『資治通鑑』이 있다. 紀傳體는 前漢때에 司馬遷이 편찬한 『史記』에서 시작하여 後漢의 班固가 편찬한 『漢書』에서 그 정형이 완성되었다.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正史로 편찬된 25사가 모두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체재는 本紀·列傳·表·志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지가 빠진 것도 있다. 본기·열전이 통상 실리므로 이를 따서 기전체라고 했다. 표는 年表·世系表·人名表가 있다. 지는 본기·열전에 들어가지 않는 사회의 중요사항을 서술하고, 그 科目은 때에 따라 늘거나 줄기도 하지만, 禮·樂·天文·五行·食貨·刑法·地理·官職등의 통치제도와 문물·경제·자연현상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기록했다. 기전체는 하나의 사건에 관한 자료가 본기·열전·지 등에, 그리고 지에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지에 분산·기록되어 있어 사건의 전모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군주와 신하의 권선징악을 평하는 監戒主義的 역사의식을 기술하는 데 적합한 체제이다. 紀事本末體는 南宋 때의 袁樞가 編年體인 『資治通鑑』의 기사를 『通鑑紀事本末』로 편찬하면서 하나의 역사 편찬기술체재로 시작되었다. 이 체재의 특징은 사건의 명칭을 제목으로 내걸고 그에 관련된 기사를 모두 모아 서술하여 사건의 전말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정치적인 사건을 기술하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인 체재이다. 편년체, 기전체에 이어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체재이다보니 그 둘의 장점을 취하고 하나의 사건이 분산, 나열되어 있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창안한 것이다. 淸代 章學誠은 尙書의 뜻을 부활시켰다는 의미에서 이 형식을 중시했다.

 

『三國志』는 이 셋방식 중에서 기전체 형식으로 쓰여졌다. 역사가란 멀리 있는 과거 시대의 것을 취할 경우는 신변에 대한 위험 요소가 거의 없지만, 그 시대, 특히 정치적 혼란이 심한 당대에서는 자유로운 집필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 점을 절감한 역사가들은 기전체를 교묘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은 사기 본기에서 景帝와 漢武帝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하자, 한무제가 이를 보고 이 두 본기를 폐기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封禪書」, 「平準書」 등을 시작으로 열전 곳곳에 그 치부들을 생생하게 나타냈다. 이러한 사마천의 기전체 기술방식은 이후 사가들에게 기전체에서 누릴 수 있는 사가의 특권적 방식으로 여기게 되었다.

 

삼국의 대립이라는 대혼란의 시기에 살았던 진수 역시 기전체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정사 『三國志』를 저술했다. 『三國志』에 志와 表 부분이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진수가 기전체에 의해 『三國志』를 썼다는 것이다. 기전체는 斷代史이면서 單一王朝를 기술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 그렇다하더라도 秦始皇帝가 春秋戰國時代의 천하를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正閏論의 입장에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漢代에도 논의가 많았었다 - 三國時代처럼 분리되어 있고, 각자 황제를 참칭했으니 기전체를 서술하는 사가로서는 본기에 그 사적을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 즉 정통 황제는 오직 한 사람뿐이며, 황제를 참칭하는 자는 閏位(정통이 아닌 천자의 자로서 일명 비정통인 세력을 일컫는 말)로서 열전에 기록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正統과 閏位의 구별, 즉 正閏論은 기전체에서 중요한 부분이며, 사가의 사관을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진수는 『三國志』에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바라보고 魏書를 본기에 기록하고, 蜀漢과 吳를 지방 정권의 주인으로 여겨 사적을 열전에 기록했다. 위서에서는 유비와 손권이 칭제를 한 사실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본래 진수는 서진의 관리였다. 그런 인물이 삼국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晉武帝 司馬炎은 魏元帝 曹奐의 禪讓을 받아 나라를 세운 것이다. 따라서 위를 부정하면 그것을 이어받은 진나라의 정통성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진나라 왕조에서 벼슬하는 진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四庫全書總目에서는 ‘가짜왕조(晉)가 가짜왕조(魏)를 계승했다고 하는 것이니 능히 그럴만 하다(四庫全書總目』, 史部, 正史類)’고 비꼬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수 이후의 『漢晉春秋』를 저술한 習鑿齒는 진수의 『三國志』의 정통론에 반기를 들고 蜀漢正統論을 들고 나온다. 그가 曹魏正統論을 부정하고 蜀漢正統論을 주창한 것은 당대의 실력가인 桓溫이 동진의 제위를 넘보려 하자 光武帝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를 담은 『漢晉春秋』를 통해 촉한을 정통으로 삼고 위나라가 비록 한나라으로부터 선양받았으나 이것을 찬탈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환온의 반역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즉, 중국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그래서 강남으로 이동한 동진 왕조를 위해서 기술한 것이다. 하지만 南朝 宋이후로 정통관념에 사로잡힌 사가들은 습착치가 옳고 진수가 그르다며 진수의 오류를 들춰내고 흠집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北宋代에 이르러서는 다시 위정통론이 힘을 얻게 된다. 歐陽脩는 위나라가 정통을 이어받은 왕조라고 주장했고 蘇東坡도 이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資治通鑑』을 저술한 북송의 사마광은 정통론의 논쟁에서 좀더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資治通鑑』에서 여러 왕조가 있던 시기에도 본기년의 연호로 시간을 나타내야 했기에 위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豈得獨尊獎一國謂之正統 而其餘皆為僭偽哉...故不得不取魏 宋 齊 梁 陳 後梁 後唐 後晉 後漢 後週年號 以紀諸國之事 非尊此而卑彼 有正閏之辨也.

어찌하여 일국만을 존중하여 정통으로 삼고, 그 나머지를 참위라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위ㆍ송ㆍ제ㆍ양ㆍ진ㆍ후량ㆍ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의 연호로써 각각 나라들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 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여 정윤을 따로 구분한 것은 아니다. 『資治通鑑』, 卷六十九, 魏紀一

 

그뿐 아니라 蜀漢正統論에 대해서도

 

昭烈之漢 雖雲中山靖王之後 而族屬疏遠 不能紀其世數名位 亦猶宋高祖稱楚元王后 南唐烈祖稱吳王恪後 是非難辨 故不敢以光武及晉元帝為比 使得紹漢氏之遺統也.

소열제의 한이 비록 중산정왕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친족관계가 멀어서 그 세대의 수와 이름, 관직 등을 기록할 수 없으니 이는 또한 유송의 고조가 초원왕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과 남당 열조가 오왕 각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광무제나 진원제와 비교하여서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없다. 『資治通鑑』, 卷六十九, 魏紀一

 

라며 정윤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정윤론에 대한 司馬光의 중립적인 입장은 朱熹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남송의 주희는 사마광의 『資治通鑑』의 저술방식을 비판하면서, 正統論에 주안점을 두고 도덕사관에 입각한 『資治通鑑 通鑑綱目』을 저술하는데 여기서 그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한다. 성리학을 주창한 주희는 기존의 정통론을 철학적 담론으로까지 이끌어내었으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性理學 사조는 촉한정통론을 보다 강화시켰다. 『資治通鑑』을 요약한 江贄의 『通鑑節要』도 촉한의 연호를 따름으로써 촉한정통론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명대 말까지 이어졌고 이러한 시대적 사조 가운데 철처하게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羅貫中의 『三國志演義』도 탄생한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를 주자 사상의 아류작이라고 하는 평도 있다. 청나라에 들어서는 조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분쟁보다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좀더 주를 이룬다. 명말까지 우세하였던 촉한정통론을 비판하면서 정통론의 기저에는 각 사가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깔려있다고 분석한다. 王夫之는 『讀通鑑論』에서 정통론 계승에 대해서 이미 쓸모없어진 것을 계속해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습착지와 주자를 비판했으며, 章學誠은 『文史通義』에서 진수와 사마광 모두 각자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에 따라 사서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Ⅴ. 三國志 敍述方式

 

1. 『三國志』 기년

 

『삼국지』는 후한말 황건봉기 이후에서부터 진이 오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할때까지를 기술한 100여년간의 역사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바라보자면 삼국시대가 시작된 기점은 220년에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를 칭하면서 연호를 황초로 바꿨고 헌제를 폐위하여 산양공으로 삼았으며, 221년에 유비가 성도에서 황제를 칭했으며, 222년에 손권이 왕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삼국시대가 펼쳐진다. 그러나 진수는 삼국의 역사 기년을 황초원년을 삼지 않고 “ 후한 광화 말년에 황건이 봉기하다 ”로부터 시작한 것은 독특하면서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황초원년으로부터 기술을 시작했으면 어떻게 그 시대가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각 나라의 군주 등장시기부터 논해야 했으며, 그들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후한말 황건봉기를 그 기년으로 삼은 것은 탁월한 진수의 능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황건봉기에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삼국지의 시작 시기의 출발은 탁월하다 아니할 수 없다.

 

2. 광범위한 분야

 

『三國志』는 여러 열전에서 다루는 분야가 광범위하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 방면의 중요인물에서부터 외국의 정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료가 총 망라되어 있다. 더구나 그 대상의 중요도에 따라서 열전을 세우거나 부속열전을 세웠다. 이것이 삼국역사 연구의 기본 참고서가 되며 고대 동아시아 역학관계를 파악하는데 아주 주요한 시대적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魏書』의 東夷⋅倭人傳은 4세기 이전 일본의 기본정황에 관한 현존하는 유일한 기록으로서 대단히 진귀한 것이다.

 

3. 각종 사료의 인용과 엄정한 취합

 

진수가 『三國志』를 저술할 때 이미 삼국시대 역사에 관한 저술이 있었다. 위나라 王沈의 『魏書』와 魚豢의 『魏略』, 촉나라 王崇의 『蜀書』, 오나라 韋昭의 『吳書』등이다. 진수는 이 책중에서 『蜀書』만 보지 못했다고 했으며 이 책들이 『三國志』의 기본 자료로서 사용 되었다. 이 기록은 삼국 중에서 한 나라의 역사적 사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삼국 전체를 총괄하였던 『삼국지』와는 다르다. 하지만 이 역사서들은 진수가 집필했던 시기와 관련들이 있다. 물론 이 각국의 사서들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魏書』는 ‘진수의 사실에 충실한 기록만 못하다(『晉書』, 卷三十九, 王沈傳)’고 했는가 하면 『魏略』은 ‘기록이 위명제에서 끝난다(『史通』, 卷十二, 古今正史)’고 했으며 또한 ‘크고 세세한 사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번잡한 것이 심히 많다(史通』, 卷四, 題目)’라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吳書』의 경우는 ‘오서가 비록 윤곽만 잡혔다고 하나 그 서나 찬은 아직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나이 70이라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죄를 감하여 종신형으로 하여 저술을 마무리 짓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으나 손호는 허락하지 않고 죽였다(『三國志』, 卷六十五, 韋曜傳)’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吳書』는 미완의 작품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隨書』 经籍志에 ‘위소(본래는 韋昭이나 司馬昭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曜라는 글자를 썼다)가 편찬했으며 본래 55권으로 양대까지 있다가 지금은 25권만 남았다’라는 기록으로 보듯이 미완성 사서치고는 그 양이 방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수의 『三國志』가 등장하면서 곧바로 앞의 사서중 몇은 존재할 가치가 사라져서 없어져 버렸다. 그만큼 『三國志』의 사실도와 질적인 면에서 타 사서를 압도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이런 점 때문에 趙翼은 卄二史箚記에서 ‘『三國志』가 비록 감싸는 점이 많다고는 하나 재단, 판단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구애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른 책에 비해서 신중하다’고 평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조비가 제위 계승함에 원굉의 『後漢紀』에는 제위를 이으라는 헌제의 조칙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三國志』에는 없으며, 『獻帝傳』에는 선양의 상주를 신하들이 11번 올리고 조비가 10번 사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시 『三國志』에는 그 기록이 없다. 조익은 이런 진수의 기술을 보고서 ‘남조의 송⋅양 전대의 여러 서적들에 비해서 간결하다’고 찬했다.

 

이러한 진수의 사료 취합에서의 공정성은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諸葛亮의 임관에 대해서도 『魏略』, 『九州春秋』에서는 제갈량이 먼저 찾아가 유비를 만나 뵌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진수는 그런 기록을 모두 삭제하고 제갈량의 出師表 내용만 실어놓았다. 손책의 죽음에 대해서도 『三國志演義』 속의 于吉의 혼령에 의한 죽음이라는 기록은 『搜神記』의 기록으로 怪力亂神 이야기다. 진수는 당연히 이 기록을 채용하지 않았다. 진수의 이러한 엄정한 사료선택과 다양하고 광범위한 기록의 수집은 『晉書』 陳壽傳에서

 

丘明既沒,班馬迭興,奮鴻筆於西京,騁直詞於東觀.自斯已降,分明競爽,可以繼明先典者,陳壽得之乎.

좌구명이 죽고나서 사마천과 반고가 번갈아 나타나서 장안에서 사서를 집필하였고 동관에서 기록을 남겼다. 이후 여러 사가들의 우열을 분명히 해볼때 앞서의 사서들을 계승할 수 있는 자는 진수다.『晉書』, 卷八十二, 陳壽傳

 

라고 했듯이 前四史로서 부족함과 손색이 없는 훌륭한 史書이다.

 

 

Ⅵ. 裵松之 補注

 

진수가 『三國志』를 쓸 무렵은 위,촉,오 삼국 정립상태가 고착화된 상황이었고 따라서 진수가 삼국 관련 사료를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면 때문에 지와 표가 없는 것이며 각 나라에 관한 내용도 불충실하고 소략한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기가 후한과 서진을 잇는 과도기라 혼란하고 복잡했기에 기록의 부실함과 착오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의 문제였다. 이러한 『三國志』의 문제는 南朝 宋의 裵松之가 삼국지의 부족하고 빠진 부분에 대해서 補注를 저술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배송지의 시대는 서진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기이고 점차로 삼국시대의 사료들이 점차 많이 발전되게 되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배송지는 보주를 작성함에 있어서 취락부분에 대한 보충, 진수의 견해와 다른 이설의 삽입, 탈오자에 대한 교정, 그리고 배송지 자신의 논증을 기술의 중요점으로 삼았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배송지가 보주로 삼은 위진대의 저작물이 200여종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저작물들은 시기가 흐르면서 거의 남지 않고 소실되기에 이르니 배송지의 보주는 그야말로 귀하디 귀한 사료로서의 가치로서 틀림없다 하겠다. 그렇기에 裵松之를 중국 역사상 위대한 사가의 한명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송지가 인용한 서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經部

『易』,『今文尙書』,鄭玄注『尙書』,鄭玄注『詩』,『禮記』,何承天『禮論』,『左傳』,『公羊傳』,『國語』,『論語』,揚雄『方言』,『三蒼』,衞恒『四體書勢序』,蔡邕『明堂論』,『尙書』,馬融注『尙書』,『詩』,『周禮』,鄭玄注『禮記』,『春秋傳』,服虔注『左傳』,何休注『公羊傳』,韋昭注『國語』,何晏『論語集解』,郭璞注『方言』,吕忱『字林』,『河圖括地象』,顧愷之『啓蒙注』, 蔣濟『郊丘議』

2. 史部. 正史類

司馬遷『史記』,應劭『漢書音義』,蘇林『漢書音義』,謝承『後漢書』,華嶠『後漢書』,韋昭『吳書』,張勃『吳錄』,王隱『晉書』,『晉書』,班固『漢書』,服虔注『漢書』,如淳注『漢書』,司馬彪『續漢書』,王沈『魏書』,環濟『吳紀』,徐衆『三國評』,虞預『晉書』

3. 史部.古史類

張璠『漢紀』,孔衍『漢魏春秋』,孫盛『魏氏春秋』,干寶『晉紀』,孫盛『晉陽秋』,袁宏『漢紀』,袁曄『獻帝春秋』,陰澹『魏纪』,習鑿齒 『漢晉春秋』

4. 史部.雜史類

『戰国策』,樂資『山陽公載記』,司馬彪『九州春秋』,『魏末傳』,鱼豢『典略』,鱼豢『魏略』,王範『交廣二州春秋』,孫盛『異同評』,王隱『蜀記』,劉艾『漢獻靈二帝紀』,王粲『漢末英雄記』,郭頒『魏晉世語』,傅暢『晉諸公贊』,皇甫謐『帝王世紀』,司馬彪『戰略』,孫盛『異同雜語』,譙周『蜀本紀』,胡沖『吳歷』

5. 史部.載記

『漢獻帝起居注』,李軌『晉泰始起居注』,陸機『晉惠帝起居注』

6. 史部.舊事

『舊事』,『獻帝傳』,『魏武故事』

7. 史部.職官

應劭『漢官儀』,『咸熙元年百官名』,『晉武帝百官名』,『百官志』,『百官名』,『晉百官表』

8.史部.儀注

摯虞『決疑要注』

9.史部.刑法

陳壽『魏名臣奏』,高堂隆『魏臺訪雜議』,『褒賞令』

10.史部.雜傳

趙歧『三輔決錄』,摯虞注『三輔決錄』,陳壽『益部耆舊傳』,『益部耆舊雜記』,張方『楚國先賢傳』,周斐『汝南先賢傳』,蘇林『陳留耆舊傳』,『會稽典錄』,『零陵先賢傳』,皇甫謐『高士傳』,皇甫謐『逸士傳』,張騭『文士傳』,『毌丘儉志記』,管辰『管輅別傳』,『王朗家傳』,皇甫謐『列女傳』,葛洪『神仙傳』,曹丕『列異傳』,干寶『搜神記』,陸氏『異林』,虞溥『江表傳』,『先賢行狀』,楊戲『漢季輔臣贊』,『漢末名士錄』,『荀氏家傳』,『曹操家傳』,『廬江何氏家傳』,『會稽邵氏家傳』,傅暢『裴氏家記』,『平原禰衡傳』,『鄭玄傳』,『鄭玄別傳』,『華佗別傳』,潘勖『荀彧碑文』,『曹瞞傳』,曹植『武帝誄』,曹植『文帝誄』,『趙雲別傳』,『虞翻別傳』,陸機『陸遜銘』,陸機『顧潭傳』,何劭『王弼傳』,『孫資別傳』,『諸葛恪別傳』,嵇喜『嵇康傳』,『嵇康別傳』,傅玄『馬鈞序』,『山濤行狀』,『荀勗別傳』,謝鯤『樂廣傳』,『潘岳別傳』,『潘尼別傳』,『盧諶別傳』,鍾會『鍾會母傳』,何劭『荀粲傳』,夏侯湛『辛憲英傳』,『郭林宗傳』,『吳質別傳』,『劉廙別傳』,『任嘏別傳』,『費禕別傳』,『荀彧別傳』,『邴原別傳』,『程曉別傳』,『濟北王志別傳』,『孫惠別傳』,『陸機陸雲別傳』,夏侯湛『魯芝銘』,『胡沖答問 』,『陸氏祠堂像贊』

11.史部.地理

東方朔『神異經』,楊孚『異物志』,『襄陽記』,『越絶書』,王隱『交廣記』,『西域舊圖』,『太康三年地記』

12.史部.譜系

華嶠『譜叙』,孫盛『魏世譜』,孫盛『蜀世譜』,『庾氏譜』,『孫氏譜』,『阮氏譜』,『孔氏譜』,『嵇氏譜』,『劉氏譜』,『陳氏譜』,『王氏(琅邪)譜』,『王氏(太原)譜』,『郭氏譜』,『胡氏譜』,『崔氏譜』,『諸葛氏譜』,袁準『袁氏世紀』,『 陸氏世頌』

13.史部.簿錄

劉向『七略』,摯虞『文章志』,司馬炎『中經簿』,荀勖『文章敘錄』

14.子部.儒家

『孟子』,『魯連子』(魯連與燕將書說文),劉向『新序』,劉向『說苑』,桓譚『新論』,曹丕『典論』.虞喜『志林』,陸機『辨亡論』,曹植『辯道論』,杜恕『家戒』,王昶『家戒』,殷基『通語』,李秉『家誡』,張敏『頭責子羽 』

15.子部.道家

『莊子』,杜夷『杜氏新書』,葛洪『抱朴子』

16.子部.法家

『管子』

17.子部.雜家

『吕氏春秋』,『淮南子』,應劭『風俗通』,蔣濟『萬機論』,傅玄『傅子』,張華『博物志』,張儼『默記』

18.子部.兵家

『孫子兵法』

19.子部.五行

『瑞應圖』,『相書』

20.集部.別集

王褒『王褒集』,張超『張超集』,孔融『孔融集』,王粲『王粲集』,曹操『曹公集』,『曹髦高貴鄕公集』,曹植『曹植集』,王朗『王朗集』,繆襲『繆襲集』,毌丘儉『毌丘儉集』,應璩『應璩集』,嵇康『嵇康集』,諸葛亮『諸葛亮集』,姚信『姚信集』,劉寔『劉寔集』,傅咸『傅咸集』,潘岳『潘岳集』,左思『左思集』,陸機『陸機集』,庾闡『庾闡集』,孫綽『孫綽集』,王彪之『王彪之集』,

21.集部.總集

『泰始八年詔』,『晉武帝太始元年詔』,應璩『書林』,山濤『启事』,裴啓『語林』 

by 나그네 | 2009/03/28 13:46 | ◈삼국지관련논제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yoneui.egloos.com/tb/188766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