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5일
어린이날 - 천재 방정환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 따라서 딱 머리속에 드는 생각은 '방정환'이라는 어른에 대한 느낌이다. 그리고, 난 방정환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천재'라는 생각이다. 물론 방정환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천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를 천재라고 여기며 생각해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왠만해서는 변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하다.
1. 방정환의 생애
방정환은 1899년에 서울 야주개에서 태어났다. 선린상고를 다니다가 가난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 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리로 일했다. 이때 두고두고 욕을 먹을, 그래서 친일파로 오인받게되는 인물인, 극렬 친일파 '유광렬'을 만난다. 하지만 친일파 친구를 둔 것이 뭐 욕먹을 일인가? 친구가 조폭이라고 나도 '조폭'인 것이 아니며 친구가 '한나라당'이라고 내가 '한나라당'사람은 아니잖아.
하여간 방정환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1917년에 당시의 갑부였던 손병희의 딸인 용화와 결혼을 한다. 이제부터 방정환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때문에 방정환에 대한 평가는 '하고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 갑부의 딸과 결혼을 했다'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손병희가 방정환을 만난 것은 권병덕(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의 소개로 만난 것이다. 권병덕과 방정환의 관계는 방정환의 부친 방경수와 권병덕이 친구였기 때문이고 또 둘은 같은 천도교였다. 방정환이 천도교인이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라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천도교의 깊은 교리를 배우게 되는 것이지, 굳이 전부터 천도교였던 것은 아니다. 방경수 역시도 천도교가 아니라 본래는 천도교의 분파인 시쳔교였다가 권명덕이 천도교로 개종하면서 따라서 개종한 것이니 뭐 '토종 천도교'였던 것 역시도 아니다. 그러니 일부러 '손병희'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동시에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인 손병희인데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잘보이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은 보지 않아도 확실하다.
방정환은 결혼하고나자마자인 1918년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보성전문학교는 무슨 학교인가. 손병희가 세운 학교지 않은가. 방정환으로서는 이러한 생활을 꿈꾸고 누리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발판은 마련된셈이다. 더군다난 1919년에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돌리다가 일경에 잡혔다가 1주일만에 석방되기도 한다. 뭐 알다시피 3.1운동은 천도교의 금전적 지원과 천도교의 주도였고 장인이었던 손병희는 검거되어 1년 8개월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죽은 것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손병희가 잡히고 그랬다고 하여 그 가산이 날라간 것은 아니다. 방정환은 20년에 일본 동양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에서 아동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러면서 또 훗날 '친일파'로 추정 단서가 되는 일본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지칭되는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를 만난다. 여기에서 방정환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21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방정환은 김기전, 이정호등과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아동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22년 5월 1일에 '어린이날'을 제정하면서 최초로 어린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23년에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5월 1일에 윤극영, 진장섭, 고한승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너무 정열적으로 그리고 과도한 흡연과 비만으로 인해 33세의 나이인 1931년에 세상을 뜬다.
2. 너무도 많은 필명들
소파,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
이것들은 모두 방정환이 잡지에 필명으로 쓴 이름들이다. 참으로 많기도 많은 이름들이다. 소파는 작품의 절반은 소파의 한글인 잔물로 썼다. 그리고 탐정소설의 경우는 북극성을 썼으며, 탐사기나 여행기에는 쌍S생, 목성을 사용했다. 이렇게 많은 필명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소파 연구가 민윤식은 세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잡지 필진의 부족함을 들었다. 당시의 시대적으로 봤을때 아동문학에 대한, 그리고 소년운동에 대한 사고를 지닌 필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방정환은 '잡지'를 채우기 위한 다양한 글을 싣기 위해서 여러 필명을 쓴 것이라는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개 알려져 이다.
둘째. 부족한 원고료를 들었다. 갑부 손병희라 하더라도 학교를 건립하고 3.1운동을 주도하고 옥살이를 하고 죽으면서 재산은 자식들에게 나눠지게 되고 방정환은 책을 발간한다, 소년운동한다, 협회를 만든다 하면서 있는 가산, 없는 가산 다 털어 붓게 된다. 이로인해 첫번째 이유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 필진들에게 나눠줄 원고료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재정상태였다. 이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파가 필명으로 여러사람 대역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신비화 전략이라는 점을 들었다. 즉, 사람들이 잡지를 읽다가 위 필명처럼 어이없는 필명을 보고는 '누구지?'라고 의문을 품고, 더불어서 그 필명의 글이 '재미있다'고 여겼을 경우 사람들은 그 필자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이때 방정환이 '그건 나요'라고 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문에 방정환의 인기는 높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를 현실적으로 봤을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첫번째다. 하지만 재정상태를 무시할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를 하다가보니까 어쩌다 된 것이니 셋째때문에 필명을 썼다는 것은 '나중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뭐 신비화 전략으로 나갈 정도로 오래 살지 않았기때문에 그닥 신빙성은 없다.
3. 죽음에 대해서
당시 소파의 죽음에 대해서 이토박사는 ‘지독한 비만증으로 피가 안돌아 심장이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지고 그 때문에 요독이라는 합병증을 얻고, 그것 때문에 시력이 떨어지며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이다’ 라고 했는데 뭐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는 부분이고, 더구나 지독한 애연가기 때문에 비만+폭연+요독으로 33세에 요절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와 별개의 이야기가 하나 더 나오는 것은 동아일보에서 발간한 ‘신동아’의 창간이라는 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동아일보가 신동아를 창간하면서 동아일보 지사와 지국이 모조리 ‘개벽사’와 거래 중지하고 모조리 판매가 ‘신동아’로 돌아서서 이에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개벽사 영업국장 박진의 증언인데 즉, 따져보면 몸 건강+정신 건강에 더블 스트레이트로 후들겨 맞은 것이리라. 이는 소파 장남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소파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동아일보'때문이지만 궁극에는 '동아일보'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소하때문에 한신이 크게 되었지만 소하때문에 한신은 죽은것이란 이야기와 같은 것이겠다. 당시 출판계의 영업은 따로이 있던 것이 아니고 신문사의 지국과 지부에서 맡았기때문이라는 사회적 유통 배급망의 후진성을 들 수 있겠다.
4. 친일파라는 이야기
방정환이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고 이러한 친일파 이야기는 희한하게도 대중에게 널리 퍼져있다. 그럼 무엇때문이야? 단초는 두가지다.
그의 호가 소파가 그가 친일이란다. 즉, 일본의 아동문학 연구가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를 존경하여 그의 이름을 호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뭐? 이게 친일파라는 증거인가? 존경하는 인물이 일본사람이면 친일파인가? 이런 어이없는 말이 어디있을까. 그리고 또 있는 것은 암곡소파 역시도 동화 구연하고 일본의 옛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일로써 아동문학을 흥성했듯이 소파도 그러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데, 방식이 같으면 ‘친’하다고 말하는 건가. 일본과 친하다고 ‘친일’은 되지만 우리가 아는 친일은 그 친일이 아니잖아. 일본에 빌붙어서 일본의 녹을 먹거나 무슨 보상을 받거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게 ‘친일’이잖아.
차라리 이런면에서 방정환은 친일보다는 ‘지일’아니겠는가. 물론 ‘어린이에 대한 생각은 단시일에 바뀌는 것이 아니고 잔물결처럼 계속해서 오래도록 퍼져나가면 달라지지 않겠는가’라고 자신의 호 소파에 대해서 아내에게 이야기한것에서 보듯이 그의 호는 이렇다. 물론, 암곡소파를 존숭하여 호로 삼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친일이랄수는 없지 않은가.
또 하나는 총독부 토지조사 시절 만났던 유광렬을 최남선과 방정환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입사시켜준 기록과 3.1운동때 청년구락부 일원이었던 유광렬과 방정환은 ‘화를 입지 않았다’라는 점으로서 그를 ‘친일’로 매도하고 한다. 유광렬과 최남선은 친일파다. 이는 확실하다. 하지만 그네들과 어울렸다고하여 방정환을 ‘친일파’로 매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친구가 '한나라당 빠돌이'면 나도 '한나라당'인가? 내 친구가 조선일보 주필이라고 내가 '조선일보 구독자'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잖아. 그러면 '의절'해야하는건가? 나랑 맞지 않는다고 의절하는 것은 '난 옳고 넌 그르다'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독단적인 생각'이지 않은가. 지금 '이명박 빠돌이'와 '안티 이명박'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지금은 모르잖아. 시세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옳고 그르지 않은가. 이는 왕안석의 개혁이 옳은가 사마광의 구법이 옳은가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친구가 '친일'을 한다고 내가 친일을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더구나 방정환은 초기에는 3.1운동에 가담을 하기는 했지만 손병희의 죽음과 그 이후로 더욱 '악랄해지는 일정'에 대놓고 항일을 할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더구나 아동, 어린이 인권에 관심많은 소파가 말이다. '친일'하는 이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그를 '친구'로 두었다고 욕 먹을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위의 저런 일로 '친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 아니겠는가?
Written by 나그네
# by | 2008/05/05 11:40 | ◈일상에서의생각 | 트랙백 | 덧글(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애매한 부분이긴 하지만, 말씀대로 친분관계만으로 그 사람을 친일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업적은 친일행각의 잔재이며, 오늘날 '어린이날' 역시 친일행각의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거 아닐까 싶은데요. -_-;
그렇다면 '어린이날'이 일본과 같다는 것도 친일잔재라고 해야 할까요. -_-;
섣부르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방정환이 '친일'이라고 판단하기엔 근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p.s.
>보성전문학교는 무슨 학교인가. 손병희가 세운 학교지 않은가.
보성전문(현 고려대)이 손병희가 세운 학교는 아닙니다.
학교 설립자는 이용익이었죠.
이용익 사후 운영이 어려워진 학교를 손병희가 인수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