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15일
[原创]诸葛辅政
诸葛亮,字孔明,琅邪阳都(今山东临沂)人。
제갈량, 자는 공명, 낭아군 양도현 사람 (지금의 산동군 임이현)
父母早逝,随叔父诸葛玄生活。
부모를 일찍 잃고, 숙부 제갈현을 따라 살았다.
诸葛玄被任命为豫章(今江西南昌)太守后,诸葛亮及幼弟随叔父到了豫章。
제갈현은 예장군(지금의 강서군 남창현) 태수에 임명되었고, 제갈량은 어린 동생과 숙부를 따라 예장에 이르렀다.
后来诸葛玄丢了豫章太守的职务,便带着诸葛亮兄弟投靠了荆州刘表。
나중에 제갈현이 예장태수의 직무를 잃고나서, 제갈량 형제는 유표에 의해 고용되어 형주로 갔다.
诸葛玄死后,诸葛亮便在公元197年来到荆州襄阳(今湖北襄阳)城西的隆中定居下来。
제갈현 사후, 제갈량은 197년에 형주 양양성 (지금의 호북성 양양현) 서쪽의 융중에 정착했다.
几年的从北方到南方的迁居、辗转漂泊的生活,使诸葛亮增长了许多见识。
수년간 북에서부터 남쪽까지 옮겨다니며, 떠돌아다니며 전전하는 생활을 하면서, 제갈량은 많은 경험을 하며 성장해갔다.
在隆中,他一边“躬耕陇亩”,一边读书。
융중에서 한편으로 “민가에서 직접 농사를 짓다”, 한편으로 책을 읽었다.
在这期间,诸葛亮读了大量的书籍,经常与自己的好友徐庶、崔州平等一起谈古论今,品评时事,探讨治世之道,他常常自比管仲、乐毅,喜欢吟诵自己创作的《梁父吟》(见《诸葛亮集》),抒发自己的远大抱负.
그런 시기에, 제갈량은 대량의 서적을 읽었고, 빈번히 자신의 친구인 서서, 최주평등과 함께 고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시사에 대해서 품평했으며, 치세의 방법에 대해서 토론했는데, 그는 늘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비교하며 자신이 지은 <양보음> (<제갈량집>에서 볼 수 있음) 을 부르는 것을 좋아하면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토로했다.
时值东汉末年,军阀割据称雄,天下大乱,刘备为了扩大自己的势力,礼贤下士,遍访人才。
동한 말년에 이르러, 군벌들이 할거하며 지역을 지배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고, 유비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현자를 예의와 어짐으로 대하고, 인재들을 두루 찾아 다녔다.
当时襄阳名士司马微告诉他:“此处有卧龙、凤雏”。
당시 양양의 명사였던 사마휘가 그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와룡과 봉추가 있다”.
卧龙是诸葛亮,凤雏是庞统。
와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이다.
后来徐庶也向刘备推荐诸葛亮,说他有才识,“确是个非凡的人。”
나중에 서서도 유비에게 가면서 제갈량을 추천했고, 그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며 “ 확실히 비범한 사람이다 ”
刘备说:“你可带他来。”
유비가 말하길 “ 당신이 그를 오게 해주시오. ”
徐庶说:“此人可往见,不可招来,将军应该枉驾拜访他。”
서서가 말하길 “ 그는 만나러 갈 수는 있어도, 내리고 올 수는 없습니다. 장군이 자신을 낮추어 방문을 해야 그를 볼지도 모릅니다. ”
刘备便亲自到隆中拜访诸葛亮,“三顾茅庐”,诸葛亮才相见,刘备诚恳求教治国平天下大计。
유비는 이에 친히 스스로 융중에 가서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 삼고초려 ”해서야, 제갈량을 만날 수 있었다. 유비는 진심으로 치국평천하의 대계에 대해서 가르침을 구했다.
诸葛亮提出了安定天下的“隆中对策”,并从此走出茅庐,结束隐居生活,开始辅佐刘备,以图大业。
제갈량은 천하를 안정시키는 “융중대책”을 제의했고, 그리고 이에 초려를 나와, 은거생활을 끝내고, 유비를 보좌하기 시작하여, 이로써 대업을 도모했다.
在诸葛亮的辅助下,按着“隆中对策”提出的方案,刘备与孙权联合,在赤壁大败曹操,然后占据了荆、益二州。
제갈량은 보조함에 있어서, “융중대책”의 제시한 방책에 따라, 유비와 손권을 엽합하여,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연후에 형주와 익주 2주를 점거했다.
公元221年,诸葛亮向刘备提出,现在曹氏篡汉,天下失去中心,为了号令天下,完成统一大业,必须赶快称帝,于是刘备在成都建立了蜀汉政权。
221년, 제갈량은 제의하여, 지금의 조조는 한황실을 찬탈하여, 천하가 중심을 잃어, 천하를 호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빨리 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유비는 성도에서 촉한정권을 건립했다.
公元222年,在荆州问题上,吴蜀之间出现了矛盾,最后为避免联盟破裂,双方平分荆州,但吴蜀矛盾并未根本解决,公元222年2月,由于东吴大将吕蒙乘虚袭取荆州,斩杀关羽,刘备闻讯大怒,不顾诸葛亮等人的劝阻,亲率大军进攻东吴,为关羽报仇,决定夺回荆州。
222년, 형주에서의 문제에 있어서, 오촉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여, 마지막으로 연맹이 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형주를 공평히 쌍방이 나눴지만, 오촉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222년 2월, 이 때문에 동오대장 여몽이 빈틈을 노려 기습으로 형주를 탈취해서는, 관우를 죽이고,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는 대노하여, 제갈량등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관우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형주를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结果猇亭(湖北宜都北)之役,被东吴大将陆逊用火攻打败,兵力损失过半,被迫丢下大批船只、器械和军资,退回到白帝城(今四川奉节)。
결과적으로 효정 (호북성 의도현 북쪽지역) 전투에서, 동오대장 육손의 화공에 격파되어, 병력을 반수 이상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많은 배, 도구와 군수물자를 버리고, 백제성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으로 퇴각했다.
公元223年4月,刘备病重,托丞相诸葛亮辅佐太子刘禅,他对诸葛亮说:“君才十倍曹丕,必能安国,终定大事,若嗣子可辅,辅之;如其不才,君可自取”。
223년 4월, 유비는 중병을 얻어, 승상 제갈량에게 태자 유선을 보좌토록 맡겼는데, 그가 제갈량에게 말하길 “그대의 재주는 조비의 10배이고,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어, 대사를 이룰 수 있으니, 만약 아들이 보좌할 만하다 여길 수 없으면, 보좌하는데 ; 그 재주가 없으면, 그대가 취해도 좋다”
诸葛亮哭泣说:“臣敢竭股肱之力,效忠贞之节,死而后已。”刘备又遗诏刘禅,告诫他,要象对待父亲一样尊重诸葛亮,和他共同治理蜀汉。
제갈량이 흐느끼며 말하길 “ 고굉지력을 다하여 충정으로써 받들어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 유비는 또 유선을 불러 유조를 남겨 그에게 권고하기를, 제갈량을 아비와 동등하게 존중해야하고, 그와 같이 촉한을 다스리도록 했다.
刘备死后,刘禅继位为皇帝,史称蜀汉后主,封诸葛亮为武乡侯,兼任益州牧。
유비사후, 유선이 황제를 이어서, 역사상 촉한후주라 칭하고, 제갈량을 무향후에 봉하여, 익주목을 겸임케 했다.
国家事务无论大小,皆取决于诸葛亮。
국가사무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일에 상관없이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 되었다.
诸葛亮辅政后,鉴于当时形势和蜀汉处境,对外派人出使东吴,重修旧盟,劝说孙权与魏国断交,使蜀汉得以全力对魏国。
제갈량이 보정한 이후에, 당시의 형세와 촉한의 처지를 감안하면, 대외적으로 동오에 사신을 보내 예전의 동맹을 회복했고, 손권에게 위나라와 단교하도록 권해, 대 위국에 촉한의 전력을 다할 수 있게 했다.
对内,经济上注意“务农殖谷”,发展农业生产,大力兴修水利,分兵屯田以减轻农民负担,实行盐铁管营等政策。
대내적으로는 경제에 있어서 “골짜기에도 농작물을 심어 농업에 힘을 썼다”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 수리공사에 힘껏 힘을 쓰고,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게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켜, 염철 등의 관영정책을 실행했다.
政治上,为加强中央集权,巩固统治、厉行法治,“科教严明,赏罚必信;无恶不惩,无善不显。”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을 강화시키고 통치를 공고히 하고 법치를 단행하여 “ 과학교육을 엄격하고 공정히 하고, 신상필벌 ;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고, 잘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
赏罚严明,任人唯贤,选拔一批有才干的人充任各级官吏。
상벌을 엄격하고 분명히 하여 사람을 임용함에 오로지 능력만을 살피며, 재능있는 사람을 각급관리에 임명하여 선출하였다.
军事上,整顿军队纪律,加紧军事训练,增强蜀汉的军事实力。
군사상으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해, 촉한의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民族关系上,采取“和抚”方针,采取马谡:“攻心为上,攻城为下;心战为上,兵战为下”的建议,对孟获七擒七纵,使之心悦诚服,平定了西南少数民族的叛乱,免除了蜀汉的后顾之忧
민족관계상, “화무” 방침을 채택했는데, 마속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요, 성을 공격하는 것이 하책이다 ;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요, 병사로싸우는 것이 하책이다” 건의를 채택하여 맹획과의 전쟁에서 칠종칠금하여, 진심으로 탄복시켰다. 서남의 소수민족의 반란을 평정하여 촉한의 모든 근심을 없앴다.
诸葛亮辅政,为了实现他“兴复汉室”的凌云壮志,五出祁山,北伐曹魏。
제갈량은 보정하면서, “ 한 황실의 부흥 ”이라는 웅대한 포부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출기산하며 조위를 북벌했다.
最后,积劳成疾,终于病倒了,于234年病故于五丈原军营中,终年54岁。
마지막에는 과로로 병을 얻어,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나, 234년 오장원 군영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 54세 였다.
纵观诸葛亮一生,从27岁离开隆中到54岁在五丈原逝世,在整整的二十七年,为辅佐刘备、刘禅,兴复汉室,运筹帷幄,殚精竭虑。
제갈량의 일생을 보면, 27세에 융중을 떠나 54세에 오장원에서 세상을 떠날때까지 27년 내내 유비, 유선을 보좌하여 한실의 부흥을 위해 장막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전심전력 하였다.
刘备深知诸葛亮贞节,临死托孤于他,诸葛亮恐负所托,为兴复汉室奋斗了一生。
유비는 제갈량의 정절을 알아, 죽음에 임해서 그에게 자식을 부탁했으며, 제갈량은 두려워하며 탁고를 받아, 한실의 부흥을 위해 일생을 노력했다.
诸葛亮始终坚持国家统一,是顺应历史发展潮流的,他所做的一切,为国家后来的统一奠定了良好的基础。
제갈량은 시종 국가통일을 견지하여, 역사 발전의 조류에 순응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여, 국가 통일을 위한 좋은 기초를 이후 닦아 놓았다.
他是个历史上杰出的政治家、军事家。
그는 역사상 걸출한 정치가였고, 군사가였다.
虽然“出师未捷身先死,长使英雄泪满襟”,但其“鞠躬尽瘁,死而后己”的精神,为后人所敬仰和赞叹,为后代为相者所效法。
비록 “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지만 뜻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길이 천하 영웅들의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두보의 시] ” 라는 말을 듣지만, 그 “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랏일에 힘써, 죽어서야 그만둔 ” 정신은 후인들에게 존경과 경탄을 받고, 후대의 승상들이 볻받아야 할 모습이 되었다.
Scraped by 나그네
Translated by 나그네
# by | 2008/04/15 13:05 | ◈삼국지주절잡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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