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24일
일지매 시대의 왕 - 仁祖
수목극의 강자 '일지매'가 이제 그 막을 오늘로써 내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왜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했는가'에 대한 생각이랄까. 우리에게 인조는 어떤 임금인가? 역사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폭군 광해군'의 폭정에 견디지 못하여 신하들이 일어서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운 왕이 '인조' 다. 하지만 - 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 신하들은 인조를 겁박하여 쓰러지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라고 강요하며 기세등등한 청에 대해서 반항하라 이르러 이에 '유약한' 인조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청이 쳐들어와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절을 하면서 신하가 된 '삼전도의 치욕'도 있다.
이렇게 보면 참 '암울한 임금'이요 '불쌍한 임금'이다. 그래서 '인조'라는 휘호를 준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사서를 하나하나 뒤져가보면서 '인조'라는 인물을 하나하나 알아가보자. 과연 그는 어떤 임금이었을까?
인조는 1623년에 인조반정을 통해서 왕에 즉위한다. 그러므로써 조선에는 두번의 '반정'이 있게 된다. 첫째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오른 '중종반정'이 있고, 이번에 말한 '인조반정이다. 그런데, 이 두개의 '반정'은 성격이 완전 틀리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최강의 왕권을 휘둘렀던 연산군이 그 왕권을 잘못다루어 폭정으로 변질되어 이를 견디다 못하여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키고는 '중종'을 즉위시킨 것이다. 즉, '중종'은 전혀 스스로 왕이 될 줄 모르고 있었으며, 반정공신이 집으로 모시러 올때까지 벌벌떨고 있던 임금이다. '중종'은 전혀 반정에 간여한 바가 없다.
그러나, 인조는 다르다. 우선 인조는 자신의 아우가 광해군에게 죽은 것에 대한 분노가 있고, 이와 더불어서 광해군에 의해 그 기득권을 빼앗긴 서인세력이 작당하여 일으킨 전형적인 '인조'의 주동하에 일어난 '반정'인 셈이다. 성격 자체가 틀리다. 그러니 즉위해서도 왕권의 파워가 전혀 틀리다. '중종'은 신하들의 힘으로 즉위하여 '신하'의 힘이 막강하였다. 이에 중종이 그들의 힘을 견제키 위해 '사림'세력을 등용하게 된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인조는 스스로가 신하들과 작당하여 왕좌를 가진 인물이고, 따라서 그 주변은 반정공신인 서인세력으로 채워넣어 스스로 왕권을 강화했다. 인조는 '왕족일파'가 자신과 같이 자기에게 칼을 겨누고 왕좌를 겨누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 인물이다. 이렇게 성격이 틀린 인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 1624년에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괄이 1등 공신대우를 맏지 못하고 한성 부윤에 임명된다. 그런데 거기다가 관서지방으로 파견나가게 되는데 관서지방이 어디인가? 조선8도에서 가장 핍박받고 멸시당하는 지역이 관서지방이다. 그래서 관서지방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홍경래, 이시애 등이 모두 관서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모두 그런 유래가 있는 것이다. 본래가 '반정부기질'이 강한 관서지방으로 불만투성이 이괄이 파견갔으니 그는 그네들과 규합하니 이것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괄의 난은 임경업, 이원익에 의해서 진압되고 인조는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대학자 기자헌 등 35인이 연루 의혹으로 인하여 죽임을 맞는다.
1626년에 인조는 느닷없이 '남한산성'을 개축한다. 물론 남한산성 개축은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에 의해서 실시되기는 했지만 다시금 인조때 개축을 하고,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설치하고는 실질적으로 군사훈련까지 시행한다. 왜 느닷없이 이 시점에서 이 짓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앞 날에 대한 걱정 혹은 명분으로 시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1627년에 후금이 쳐들어오고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도주한다. 그리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형제의 맹'을 맺고 후금은 돌아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꾸준하게 반란이 일어나는데 후금이 돌아가고 나서 이인거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 다음해인 1628년에 유효립이 반란을 일으켰다. 1629년에는 양경홍이 역모를 꾀했다.
국내적으로 이러한 난리통이 일어나는 와중에 1630년 명의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의주를 노략질하는 짓이 발생한다. 이에 인조는 이상한 영을 내리는데 그것이 척화의 명으로 후금과 단교하고 명과의 사대를 존숭하자는 것이다. 하여튼 이런 이상한 짓을 하니 후금이 가만있을리가 없다. 1636년에 청이 1627년의 '강화조약'을 조선이 어겼다고 쳐들어오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지만 청군의 막강한 공세를 이겨내지 못해 이듬해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자 버틸 힘을 이겨내지 못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고, 이때 소현세자가 청으로 붙들려 끌려간다.
소현세자와 이완, 임경업은 청으로 가서 청의 명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전쟁을 하지만 임경업은 병자호란의 치욕등에 대한 청의 복수로 인하여 명나라 군과 합세하기도 하고 청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청의 눈 밖에 난다.
그러다가 1645년 1월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3월에 느닷없이 병으로 죽고만다. 과로와 피로라고 하는데 청나라에서의 혹독한 9년의 세월도 견뎌내고 거기서 각 전쟁을 치른 소현세자가 돌아온지 2개월만에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많다. 그리고 5월에 봉림대군이 청에서 돌아오고 인조는 봉림대군을 6월에 세자로 세우고, 소현세자의 빈을 죽인다. 세자가 된 봉림대군이 이완과 '북벌'을 꾀했던 임금 '효종'이다.
그 다음해인 1646년에 인조는 청에 요청하여 임경업을 조선으로 돌려달라 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일어난 좌의정 심기원의 반역사건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죄목때문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임경업은 그렇게 처형되었다. 청나라에 근 10여년을 있으면서 명나라에 붙었다 청나라에 붙었다하면서 조선을 위해 싸운 이가 어떻게 조선의 반란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의심만 갈 뿐이다.
하여튼 이러한 의심많은 임금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것에도 걱정이 안 놓였는지 1647년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그리고 인조 자신은 1649년에 그 파란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24년의 재위기간 중에 거의 매년 '반란','역모'가 끊이지 않았고 '호란'을 두번이나 겪은 임금. 국제정세에 어둡고 자신의 왕권만을 위하여 끊임없이 신하들을 의심하고 옥죄이고 자식까지 '의심스러운 죽음'에 이르게한 임금이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은 두명의 '임금답지 않은 임금'을 모셨다. 하나는 '선조'이고 또 하나는 '인조'라고 할 수 있다.
Written by 나그네
# by | 2008/07/24 23:25 | ◈일상에서의생각 | 트랙백 | 덧글(3)









